본문 바로가기
역사/중국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선조, 신라인 김함보 (2)

by Interesting Story 2020. 8. 26.
반응형

이번 포스팅은 아래의 포스팅에서 이어집니다. 만주의 역사 중 금나라의 건국 시점을 중심으로 금태조 아골타의 선조가 신라인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참고로, 많은 내용이 KBS 역사스페셜의 내용을 재구성한 부분들로 작성되어 있음을 밝히며, 다시 말하지만 신라인의 후예가 금나라를 건국하였다는 민족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내용이 아니라 중국의 동북공정이 해석에 따라 쉽게 논파가 가능하고, 허황된 역사관이라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2020/08/25 - [역사/중국] -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선조, 신라인 김함보 (1)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선조, 신라인 김함보 (1)

지난번 요하 유역의 요하문명과 관련해서 그 당시 만주 지역의 세력권과 고조선에 대한 포스팅을 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포스팅의 연장선상에서 금태조 아골타의 선조가 신라 출신이라는

interstory.tistory.com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무덤은 경주가 아닌 경기도 연천에 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부터 경순왕까지 56대에 걸쳐 무려 천년간 신라를 다스린 왕들의 무덤은 천년 고도 경주에 있는데, 유일하게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무덤은 경기도 연천에 있습니다. 왜 경순왕의 무덤은 경주가 아닌 경기도 연천에 있을까요.

-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릉, 경기도 연천 소재, 출처: 문화재청 -

후삼국 말기인 935년, 후백제의 계속된 침공으로 영토를 잃어가던 경순왕은 세력을 키워가던 고려에게 항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순왕은 고려의 신하로, 또 왕건의 사위가 되어 43년을 더 살다가 978년 생을 마감합니다. 이때 신라의 유민들이 경주에 장례를 모시려고 하였지만, 고려의 조정에서 왕의 시신은 백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하여서 경기도 연천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 KBS 드라마 태조왕건, 왕건과 경순왕, 출처: http://mlbpark.donga.com/mp/b.php?p=1471&b=bullpen&id=201809220023361647&select=&query=&user=&site=donga.com&reply=&source=&sig=h6j6Gf2g6hjRKfX2hgj9RY-A6hlq -

신라는 죽지 않았다.

신라가 고려에 천년사직을 넘겨주기로 결정할 때, 경순왕의 태자, 마의태자(麻衣太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결사 반대하였습니다. (마의태자는 신라의 항복 이후 숨어 살며 평생을 베옷을 입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가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어떤 다른 기록도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 행적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며, 강원도 인제 지역에서 저항군을 이끌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신라부흥운동설)

항복을 반대하던 왕자가 개골산에 들어가다 ( 935년 10월(음) )
9년(935년) 겨울 10월에 왕은 사방의 토지가 모두 남의 소유가 되어 국력이 약해지고 세력이 작아져 스스로 편안할 수 없게 되었다고 여겨, 여러 신하들과 국토를 들어 태조에게 항복하고자 논의하였다. 신하들의 의논하기를, 혹자는 옳다 하고 혹자는 옳지 않다 하였다. 왕자 165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天命)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다만 충신(忠臣)·의사(義士)와 함께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 수비하다가 힘이 다한 후에 그만두어야지, 어찌 1천년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주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작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형세가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의 간(肝)과 뇌장(腦漿)이 땅에 쏟아지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라 하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 166에게 편지를 가지고 가게 해 태조에게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왕자註 167가 울며 왕에게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皆骨山)註 168에 들어가 바위에 기대어 집으로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출처: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12r_0060_0260&position=-1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에는 다물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다물리) 다물은 빼앗긴 나라의 광복을 뜻하는 말입니다. (고구려어로 옛 땅을 회복함이라는 뜻) 그런데, 강원도에 무슨 나라가 있었다는 뜻일까요. 그런데, 금강산에서 쓸쓸하게 죽었다는 마의태자의 유적들이 강원도 인제에 많이 발견됩니다.

- 강원도 인제군 남면 신풍리에 있는 마의태자 유적지비,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iosigma&logNo=20044330493&parentCategoryNo=3&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

강원도 인제군 김부리에는 대왕각이라는 사당이 있는데, 여기에는 마의태자의 위패를 모시고, 김부리 사람들이 매년 제사를 지냅니다.

 

사실 신라가 천년사직을 고려에 넘길 때에 화랑들이 가만히 있었다는 것은 화랑이라는 집단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상식적으로 맞지 않고, 큰 저항이 없이 신라가 망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신라가 망한 후에도 신라인들이 고려에 저항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인제 인근 곳곳에는 이러한 마의태자의 유적들이 남아 있어 대표적인 곳이 강원도 인제로 추정됩니다.

- 고려초, 신라의 저항세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KBS 역사스페셜 영상 캡처 -

그런데, 이 신라의 저항 세력이 금나라 태조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우선 고려사에 보면 평주의 승려인 금준이 여진에 들어가 금의 선조가 되었는데, 평주 승려 금행(김행)의 아들 극수라고도 한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중국의 사서들에 나오는 이야기와 출처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일맥상통합니다.

어떤 이가 이르기를, “옛날에 우리 평주(平州)의 승려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를 일컬어 금의 선조라 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평주의 승려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 여진에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았는데, 여진의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 태사(古乙 太師)라 하였다. 고을이 활라 태사(活羅 太師)를 낳았다. 활라에게는 아들이 많았는데, 맏이를 핵리발(劾里鉢)이라 이르고, 막내를 영가(盈歌)라고 일컬었다. 영가가 가장 재지와 용력이 뛰어나[雄傑], 뭇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으니 핵리발의 맏아들인 오아속(烏雅束)이 지위를 계승하였다. 오아속이 죽으니 동생인 아골타(阿骨打)이 섰다.”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권8 > 예종2(睿宗二) > 예종(睿宗) 10년 > 1월 > 여진 완안아골타가 금을 건국하다
출처: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j&bookId=%EA%B6%8C8&types=r#detail-kingYear/kj_008r_0010_0030_0010_0020/16/1115/01

 

- 고려사 예종 10년에서 발견되는 금나라 선조에 대한 기록, 출처: KBS 역사스페셜 영상 캡처 -

그런데, 고려사에 등장하는 김행과 같은 이름이 등장하는 기록이 또 있습니다. 바로 강원도 원주에 있는 해사록(海槎錄)인데, 1636년에 김세렴(金世濂)이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남긴 여행기입니다. 이 책에 보면 경주에 들렸다가 그 감회를 기록한 대목이 있는데, 김유신의 묘라던가 포석정, 첨성대 등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완안 아골타가 경순왕의 외손이자 권행의 후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 김세렴의 해사록에 아골타는 경순왕의 외손이라는 기록이 있다. 출처: KBS 역사스페셜 영상 캡처 -

그런데, 권행의 후손이라니 조금 의아합니다. 아골타의 선조 함보는 김씨인데, 왜 갑자기 권행의 후손이 나오는가 말이죠. 

 

930년,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은 안동 병산에서 대 혈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때 안동의 권행과 김선평, 장길 세 사람이 왕건을 도움으로써 고려군은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일명 고창전투(古昌戰鬪)) 그리고,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백제는 서서히 쇠퇴하면서 붕괴하게 되었죠. 이 전투 이후 왕건은 권행, 김선평, 장길 세 사람에게 태사의 지위를 내리고 김행에게 권씨를 하사하였습니다. 이로써 김행은 안동 권씨의 시조인 태사공 권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태사라는 최고의 직위를 받은 권행의 후손들이 이상하게도 100년이 넘게 고려 조정에 나간 기록이 없습니다. 이것은 권행이 신라를 위해 후백제와 싸운 것이지 고려를 위해 싸운 것은 아닌 것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사실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이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인지는 불분명합니다.

- 권행이 고려사에 등장하는 김행인지는 불분명하나, 신라의 저항 세력과 묘하게 닿아 있다. 출처: KBS 역사스페셜 영상 캡처 -

여기까지 보았을 때 김함보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김씨 출신의 신라 광복군으로 생각되며,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선조인 것은 명확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추정을 해보자면, 김함보는 신라의 왕족인데, 신라가 망하고 김함보를 중심으로 한 반고려 세력들이 두만강을 건너 여진 지역에 옮겨간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바뀌는 그 격동의 시기에 망국의 한을 품고 새로운 땅 만주로 향했던 신라 왕족 김함보와 그의 무리들, 그들은 여진족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갑니다. 아래의 위키피디아 항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남송대 모요가 기록한 《신록기》에서는 함보가 신라에서 도망쳐 완안부로 왔다고 한다.
(중략)
《신록기》에 따르면, 함보는 벽목(劈木)하여 문서와 같이 계약을 이루워냈다. 부민들로 하여금 빚을 내게하고, 이자가 늘어나게하여, 근면하게 밭에 종자를 뿌려 마침내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만약 도적이 닭, 돼지, 개, 말을 훔치는 것을 본다면, 질곡(桎梏)으로써 형틀에 묶고, 버드나무 가지를 이용하여 채찍질하였고, 그 외에는 7배로 배상하는 법령을 엄준하고 과단하여 사사롭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근방이 모두 복종하여 신명(神明)이라 칭하였다. 《금사》에 따르면, 함보가 완안부에 이르러 오래 거주하였는데, 그 부민들은 일찍부터 타족 사람들을 죽였고 이로 인해 양족은 원한으로 싸움이 그치질 않아 해결되지 않았다. 완안부민들이 함보에게 양족이 서로 죽이지 않게 해 준다면, 완안부에 나이 60세의 미혼녀가 있으니 서로 결혼시켜 주고 정식 완안부민으로 받아줄 것을 제안하자 함보는 승락했다. 함보는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주모자 1명만 처벌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물건으로 보상토록 하면 싸움도 그치고 이득도 될 것이라 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만일 살상할 경우, 살인자가 피살자 가족에게 자기가족 1명, 암말 10마리와 수말 10마리, 암소 10마리, 황금 6냥을 주면 즉시 양측은 화해하고 사적인 싸움을 하지 않기로 한다는 법을 규정했다. 완안부민들은 이 규정을 믿고 준수하였으며 이에 대한 사례로 함보에게 청우 1마리를 주고 60세 된 여자를 신부로 데려가는 것을 허용하였다.《신록기》에 따르면 그녀의 나이가 40세였고, 성은 결도고단(結徒姑丹)씨라고 한다. 함보는 마침내 청우를 이용하여, 결도고단씨 일가에 보낼 혼례 예물을 마련함과 동시에 그의 자산을 마련하였다. 결도고단씨는 우마로서 농작기구를 재물로 사용하여, 마침내 함보는 그녀와 혼인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함보 항목

 

고려의 여진족 토벌 전쟁

김함보가 여진족의 지도자가 되고 150여 년이 지난 후 여진족은 세력이 불어나기 시작하면서 함경도 인근에서 고려와 잦은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아골타가 여진족의 지도자가 되기 전인 1107년 12월,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윤관 장군이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와 함께 고려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족 토벌 전쟁에 나서 여진군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확보합니다. 그리고, 공험진에 국경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모습은 북관유적도에 실린 척경입비도에 나옵니다.

- 척경입비도, 고려의 국경비를 세우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

그렇다면, 고려의 북쪽 국경선인 공험진은 어디일까요. 함경도 종선에서 북쪽으로 700리에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세종 때 실측하여 그려진 조선국회도를 보면 함경북도 종성의 북쪽인 두만강 너머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 조선국회도에 고려의 북방 경계선인 공험진은 두만강 너머에 있다. 출처: KBS 역사스페셜 -

이렇듯 조선국회도와 북관유적도를 종합하여 미루어볼 때 중국 지린성 옌지시 인근이 공험진비가 있던 장소로 추정이 되는데, (실제 행방은 알 수 없는 상태) 이때, 여진족은 주요 근거지 중 하나인 간도 지방을 고려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여진족은 고려에 동북 9성을 돌려달라는 서신을 보내게 됩니다. 이 때 여진 추장은 아골타의 형인 오아속이었는데, 고려사에 이와 관련된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면 자신들의 선조가 대방, 다시 말해 고려로부터 나왔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기고 있으니 땅을 돌려주면 고려 국경으로 기와 조각도 던지지 않겠다고 적혀 있습니다. 여진족, 다시 말해 금나라에게 고려는 자신들의 선조가 나온 부모의 나라인 것입니다.

여진 요불 등이 내조하여 9성 환부를 간청하다

褭弗史顯等復至咸州, 告曰, “我等願入朝. 然時方交戰, 疑懼, 不敢入關. 請以官人交質.” 等以李管仲異賢等爲質. 褭弗等遂來朝. 御宣政殿南門, 引見褭弗等六人, 宣問來由. 褭弗等奏曰, “昔, 我太師盈歌嘗言, ‘我祖宗出自大邦, 至于子孫, 義合歸附.’ 今, 太師烏雅束亦以大邦爲父母之國. 頃, 有弓漢村人自作不靖, 本非太師指揮. 國朝聲其犯境之罪, 討之, 復許修好. 故我信之, 朝貢不絶, 不謂去年大擧而入, 殺我耄倪, 築置九城, 使孑遺之民靡所止歸. 故太師遣我來請舊地. 伏望憐憫, 還許九城, 使之安生, 則我等告天爲誓, 至于世世子孫, 恪修世貢, 亦不敢以瓦礫投於境上.” 王慰諭, 賜酒食.

○요불(褭弗)·사현(史顯) 등이 다시 함주(咸州)에 이르러 고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입조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지금 막 교전 중이어서 의심스럽고 두려워 감히 관내로 들어가지 못하겠습니다. 관인을 인질로 맞바꾸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윤관 등이 이관중(李管仲)·이현(異賢) 등을 인질로 삼으니, 요불 등이 마침내 내조(來朝)하였다. 선정전(宣政殿) 남문(南門)에 임어하여 요불 등 6인을 접견하고 내조한 연유를 물었다. 요불 등이 아뢰어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귀국[大邦]으로부터 나와서 자손에 이르렀으니 의리상 귀부하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太師) 오아속(烏雅束) 역시 귀국을 부모의 나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근자에 궁한촌(弓漢村) 사람이 스스로 소란을 일으킨 것이었지 본디 태사가 지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국에서 변경을 범한 죄를 들어 토벌하였다가 다시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것을 믿고 조공을 끊이지 않았는데, 생각하지 않게 작년에 대거 쳐들어와서 우리 노인과 어린아이를 살상하고 9성을 쌓아 두어 잔존한 유민들로 하여금 돌아갈 곳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태사가 저를 보내와 옛 땅을 청하게 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불쌍하게 여기시고 9성을 되돌려 주셔서 편안히 살게 해주신다면, 우리들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건대 대대로 자손에 이르기까지 정성껏 조공[世貢]을 바치고 또한 감히 국경에 기와 조각도 던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위로하여 타이르고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고려사절요 권7 > 예종문효대왕1(睿宗文孝大王一) > 예종(睿宗) 4년 > 6월 > 여진 요불 등이 내조하여 9성 환부를 간청하다
출처: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j&bookId=%E5%8D%B733&types=r#detail-kingYear/kj_007r_0020_0050_0050_0050/16/1109/06

- 고려사에 기록된 여진족의 서신 내용,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한다. 출처: KBS 역사스페셜 영상 캡처 -

여진족과 발해

금나라 5경 중 하나인 동경요양부, 그 동경요양부가 있었던 랴오닝성의 랴오양(요양)에서 1985년 1190년 제작된 한 점의 비가 발견됩니다. 이 비에 기록된 내용은 덕망 높던 한 스님의 일대기였는데, 스님의 성은 고씨이며 발해인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 중국 요양의 1190년 제작된 비에 발해인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출처: KBS 역사스페셜 영상 캡처 -

이게 왜 놀랍냐 하면 고구려 유민인 대조영이 건국하였던 발해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게 926년에 멸망하였는데, 발해가 망한 지 264년이 지난 1190년에도 발해인으로 적혀 있는 것입니다. 여진족과 발해인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금사의 기록에 따르면 여진과 발해는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는데, 완안 아골타는 거란에 맞서 봉기하면서 이를 주장해 발해 유민들의 호응을 얻습니다. 이런 주장이 그 당시에 쉽게 받아들여져 반거란 연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은 이미 여진과 발해 사이에 민족적으로 친연 관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 여진과 발해는 한 집안 출신이라는 금사의 기록, 출처: KBS 역사스페셜 영상 캡처 -

현재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은 송나라 때까지만 해도 한족에게는 변방에 불과한 곳이었는데, 여진족이 중원을 장악한 후 이곳에 대규모로 신도시를 건설하고, 이후 베이징은 중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요금성곽박물관 지하에는 금나라 때 건설한 대규모 수로시설의 유적이 남아있는데, 인공으로 수로를 파고 물길을 연결한 것입니다. 그리고, 베이징의 명소인 북해공원도 이 당시에 완성된 인공정원이고요. 

- 금나라는 북경에 대규모 신도시를 건설한다. 출처: KBS 역사스페셜 영상 캡처 -

 

그리고 이 베이징의 대규모 신도시 건설의 총책임자는 장호였는데, 장호는 4대에 걸쳐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발해 유민이었습니다. 그리고 장호뿐 아니라 수많은 발해인들이 금나라의 고위 관료층을 형성하고 금나라를 건설하는 중추가 되었는데, 금의 입장에서는 발해라는 제국을 건설하고 운영하였던 발해 유민들의 경험을 활용하여 국가체제를 확장하고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금나라는 발해인들을 중용하였습니다.

- 금사에 기록된 발해 유민 장호, 출처: KBS 역사스페셜 영상 캡처 -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랴오닝성의 랴오양(요양)은 금나라 5경 중 하나인 동경요양부가 있던 도시 중 하나였는데, 그래서 수많은 금나라 시대의 금석문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요양박물관에 가면 통혜원명 대사 탑명이 있는데, 이 비에 적힌 내용의 주인공은 관찰사 이후의 딸인 발해인이며, 남편은 아골타의 셋째 아들인 허왕입니다. 그리고 후에 금의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 황제가 되는 정국공의 어머니이고요.

- 통혜원명 대사 탑명에 기록된 발해인, 허왕의 아내이자 정국공의 어머니, 출처: KBS 역사스페셜 영상 캡처 -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 또한 발해인 대씨(大氏)였습니다. 이 외에도 발해인(정확히 말하자면 발해인의 후손)이 금황제의 황후나 비빈인 사례가 꽤 많은데, 금나라 건국 후 많은 발해인들이 금나라 황실과 혼인을 맺었습니다.

 

이렇게 발해는 멸망하였지만, 발해인들은 금나라의 고위 관료층과 왕비족으로 자리를 잡았고, 금나라는 발해인과 여진족 간의 일종의 연합정권 성격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 이제 여기까지의 내용을 요약해보겠습니다. 금 황실의 선조가 신라 출신, 국가의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던 발해의 유민들, 그리고 고려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살펴보면 여진족의 나라인 금은 우리와 굉장히 깊은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금나라는 발해의 후손인 왕비족과 신라 김함보의 후예인 여진의 왕족이 결합하여 건국된 것인데, 이 정도면 우리 역사의 한 자락에 자리매김해도 손색이 없겠지요. 그리고, 금사는 우리 역사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만주의 역사는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 그리고 신라의 후예와 발해 유민이 세운 금나라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이건 중국의 역사와는 상충되고, 우리 역사와는 맥락이 닿겠죠.

※ 하지만 발해인을 이렇게도 중용하다가 이후에는 이질적인 집단으로 간주하여 굉장히 차별했다는 기록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청나라 황실의 성, 아이신줘러, 애신각라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1987년작, 마지막 황제를 보면, 전범 재판에서 황제를 '아이신줘러 푸이'라고 호명합니다. 아이신줘러. 한자로 쓰면 애신각라(愛新覺羅)가 됩니다. 애신각라. 청나라 황실의 성이 아이신줘러, 한자로 음차 하면 애신각라인 것입니다. 이 애신각라가 무슨 뜻인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 참고로 애신각라가 신라를 사랑한다는 뜻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 있으나, 이 부분은 이 포스팅을 계속 보시면 단순히 한자로 음차 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쉽게 논파됩니다.

- The Last Emperor, 1987, Bernardo Bertolucci, 전범재판에서 황제를 아이신줘러 푸이라고 호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

금나라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에게 중원을 내어 주면서 120년의 역사를 끝으로 멸망과 함께 만주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원나라가 중국 대륙을 장악하였다가 1368년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면서 중원을 차지하고 북방 민족에게 300여 년간 지배를 받던 한족의 자부심을 회복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 알았던 여진족이 1616년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청나라의 6대 황제 건륭제는 1735년부터 1796년까지 61년 동안 재위하였는데, 이때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지역까지 장악하면서 현재의 중국 영토를 이루게 됩니다.

- 청의 6대 황제 건륭제(좌), 1765년 청나라의 최대 강역(우), 출처: 위키피디아 -

베이징에 청 건륭황제의 7대손인 김괄 교수가 있습니다. 청 황실의 성은 아이쉰저러(애신각라)인데, 그 후손은 자신의 성이 김씨라고 합니다.

- 천 건륭제 7대손 김괄(좌), 자신의 이름을 김괄이라고 쓴 붓글씨(우), 출처: KBS 역사스페셜 영상 캡처 -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였는데, 청 활실의 성은 아이쉰저러(애신각라)입니다. 그런데, 왜 청 황실의 후손인 김괄 교수는 자신의 성을 김씨로 알고 있고,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건륭제 시절에 편찬된 누르하치의 일대기를 담은 청나라의 역사서, 만주실록을 보면 청의 황실과 만주족에 대한 상세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애신각라에 대해 살펴보면, 만주어 아이신을 한자로 단순 음차 하니 애신이 되었고, 이 아이신(애신)은 금이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줘러 역시 한자로 차음 표기한 것이고, 이것이 각라입니다. 줘러(기오로겨레, 성, 씨족이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애신각라가 신라를 사랑한다는 뜻이라는 황당한 주장은 쉽게 논파됩니다.)

- 만주실록에 나오는 애신각라의 유래, 출처: KBS 역사스페셜 영상 캡처 -

다시 말해서 아이신줘러우, 애신각라는 금 부족들, 즉, 김씨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신라 왕실의 성인 경주 김씨, 그리고 신라인의 후예인 금 황실, 그리고 그 금나라의 후신인 청 황실, 이들 모두가 김씨입니다.

 

중국은 한족 중심의 사관에서 다민족 통일 사관으로 노선을 변경한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은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킵니다. 이 때 중국인들이 내세웠던 구호가 청나라 말기의 태평천국운동과 마찬가지로 멸만흥한(滅滿興漢, 또는 배만흥한(排滿興漢))이었습니다. 멸만흥한 또는 배만흥한. 만주족을 멸하고(또는 배척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뜻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당시 한족들이 만주족들과 역사적으로나 혈연적으로 다른 민족임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수천 년간 이어진 한족 중심의 역사관을 폐기하고 다민족 통일 사관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중국 역사라고 하면 한족이 이민족에 항쟁한 역사였는데, 이제는 다양한 민족이 중국이라는 통일된 국가를 이루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동북공정인데, 이민족인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그리고 금나라와의 전쟁도 중국 내부의 갈등에 불과한 것으로, 중국의 역사로 모두 편입시켰습니다.


중국 항저우에 가면 악왕묘가 있는데, 남송 초기의 명장인 악비(岳飛)의 사당입니다. 송이 멸망하면서 양자강 너머에 자리를 잡은 남송은 금나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고, 이때 악비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금나라의 침략을 수차례 저지합니다. 악비가 이끄는 군대는 악가군이라고 불렸는데, 명실공히 남송 제일의 최정예 군단으로, 싸움에서는 반드시 이기고, 백성들에게는 결코 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백성들이 앞다투어 술과 고기를 바칠 정도였다고 하죠. 중국 역사에서 관우와 더불어 양대 충장으로 불리면서 영웅 중의 영웅으로 엄청나게 높은 추앙을 받는 인물입니다. (우리나라의 충무공에 비유할 수 있는 인물) 그래서, 이 곳은 중국인,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중국인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한족들에게 마치 성지와도 같은 곳입니다.

- 악왕묘의 악비 상, 출처: 위키피디아 -

악비가 얼마나 추앙을 받는 인물이냐 하면 항저우에 가면 세계 3대 쇼 중 하나인 송성가무쇼가 있습니다. (세계 3대 쇼는 프랑스 파리의 물랑 루주,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O쇼와 중국 항저우의 송성가무쇼입니다.) 그런데, 이 송성가무쇼의 하이라이트 부분이 바로 악비장군이 여진족과의 전쟁을 치르는 무용담입니다.

- 항저우의 송성가무쇼, 악비 장군의 무용담이 하이라이트다. 출처: http://boomup.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4/25/2014042500973.html -

이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악비의 묘 앞에 가보면 무릎을 꿇리고, 손은 뒤쪽으로 포승줄로 묶인 진회(秦檜) 부부와 간신 2명의 동상이 있는데, 이 진회는 남송의 재상으로 부인과 함께 악비 장군을 독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치 영원히 벌하는 듯이 말이지요. 사람들이 악비의 묘에 참배를 하면서 이 동상에 침을 뱉는다고 합니다. 영웅 악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진회는 중국에서는 간신에 매국노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입니다.

- 악비의 묘 앞에 있는 진뢰 부부의 동상, 옷이 벗겨지고 손이 뒤로 묶인채 무릎을 꿇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

이 진회가 중국인들에게 어느 정도냐 하면 중국인들은 지금도 이름에 회(檜)를 사용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위키피디아 진회 항목에도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 중국인들은 이름에 회(檜)를 사용하지 않는다. 출처: KBS 역사스페셜 영상 캡처 -

중국인들이 아침식사로 즐겨먹는 유탸오라는 음식이 있습니다. 중국식 꽈배기인데, 밀가루 반죽 두 가닥을 꼬아서 기름에 튀겨서 만듭니다. 근데, 이 유탸오가 악비의 원한을 풀기 위해 진회 부부를 형상화한 것으로 기름에 튀겨서 고통을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중국식 꽈배기 유탸오, 진회 부부를 형상화한 것이다. 출처: 나무위키 -

위의 내용들을 보았을 때 이민족으로부터 한족을 지켜낸 악비에 대한 중국인들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알 수 있겠지요. 한족이 거란이 세운 요, 여진이 세운 금, 몽골이 세운 원나라로부터 공격을 받고 지배를 받은 그 시기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이민족을 물리쳐낸 자랑스러운 인물, 민족 영웅 악비. (중국, 더 정확히는 한족의 입장에서.)

 

그런데, 2002년에 중국은 동북공정을 시작하면서 악비가 더 이상 민족 영웅이 아니라는 고등중학교 역사 대강을 발표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조금 실소가...)

- 중국의 영웅 악비를 격하시키기 시작한다. 출처: KBS 역사스페셜 영상 캡처 -

왜 민족의 영웅인 악비를 격하시키기 시작하였을까요. 한족들은 예로부터 중화사상이 있었고, 한족 이외에는 전부 오랑캐라고 했습니다. 이민족 오랑캐들을 동이와 서융, 남만과 북적이라 비하하며 불렀죠. 그런데, 악비가 민족 영웅이면 금나라의 김올출은? 바로 침략자가 되죠. 이 지점에서 만주의 역사, 금나라의 역사도 중국 역사로 편입시켜야 하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모순이 생깁니다. 현재의 중국 영토를 기준으로 역사 속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중국인이 되어야 하고, 중화민족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소수민족들도 모두 중국인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단일민족 국가도 아닌데, 그렇게 만드려니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되죠. 아주 그냥 오랑캐라고 비하할 때는 언제고 이런 북방 민족들의 역사까지 중국의 역사라고 다 집어넣다 보니까 딜레마가 생긴 겁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 오랜 세월 동안 민족의 영웅이었던 악비는 중국 대륙 통일의 장애물로 전락하고, 금나라와 화친론을 펼친 진회를 민족 화합의 영웅처럼, 유연한 외교를 펼쳐 국가적 어려움을 해결한 인물로 재평가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인식은 바뀌지 않아 여전히 성지 순례하듯 악비의 묘를 참배하고 진회 동상에 침을 뱉는다고 합니다.) 

 

아전인수격의 역사 해석은 지양해야

중국에서는 중국 주변의 나라들 모두가 중국 역사에 있는 국가이며, 소수민족들까지 모두 중국인이었다는 다기원론까지 주장하면서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역사를 왜곡하는데, 우리 역시 그런 논리를 전개하면 금나라와 청나라를 한국사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압니다만.) 이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역사는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중원을 빼앗기고 황제가 포로가 되는 치욕을 한족들에게 안겨준 이민족이 세운 금나라, 더구나 금태조 아골타의 시조가 신라 후손이라는 것은 중국의 야심 찬 동북공정(東北工程) 역사관을 뒤흔들기 충분하죠. 그동안 우리는 한족은 우수하고, 흉노, 여진 등은 북방의 오랑캐라는 소중화 사상에 빠져 있지는 않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