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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중국

몽골에 의해 전쟁 포로가 된 한족 황제, 명나라 영종 (토목보의 변)

by Interesting Story 2020.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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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흉노, 선비, 돌궐, 거란, 여진 등 대륙의 북방민족 역사는 중국 영토에서 대부분 일어난 일이기에 모두 중국사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지만, 개인적으로 그 모든 것을 중국의 역사로 보지 않는 시각도 많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중국의 역사는 한족이 외부 이민족과의 침입을 막아내는 항전을 통해 중원을 빼앗기거나 되찾는 과정이 주된 줄기이고, 나머지는 중국의 역사일 수도, 아니면 다른 국가의 역사일 수도 있다고 보는 입장인데, 예를 들어 만주를 포함한 북방에서의 역사 중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도 있거든요. 혹시라도 불편한 분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런 시각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명나라 영종, 정통제가 포로가 된 이야기를 써보겠습니다. 참고로 중국 역사 속에서 전쟁터에서 포로가 된 유일한 황제이자, 중국의 치욕적인 역사 중 하나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 위세 등등한 몽골의 기병 부대, Mongol: The Rise of Genghis Khan, Mongol, 2007, Sergei Bodrov, 이미지 출처: 다음영화 -

오이라트와 명(明)의 충돌

현재 중국 북부의 국경 근방에 내몽골 자치구가 있는데요, 지금은 이렇게 중국의 일부이지만, 몽골족은 한 때 중원을 차지했고, 칭기즈 칸이 등장하면서 13세기 몽골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였던, 세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국가였습니다. 몽골 기병들은 실로 엄청났죠. 고려도 원(元)나라의 내정 간섭을 오랜 기간 받았던 뼈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 1279년 몽골제국의 영토, 고려 역시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이 몽골이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

몽골제국이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시기, 전성기를 누리던 원나라는 혜종(惠宗) 시절인 1368년 수도 대도를 주원장(朱元璋)의 명나라에게 빼앗기고 북방의 초원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참고로 원나라의 수도였던 대도는 현재의 북경입니다. 그리고 명(明)나라에 밀려 만리장성 너머 북방으로 밀려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역사는 원나라에서 북원으로 이어지게 되죠.  이때 비록 원나라는 북방으로 밀려나 북원이 되었지만, 몽골계 유목민족 중 하나인 오이라트가 성장하게 되는데요, 오이라트의 에센 다이시(후에 몽골제국의 제29대 대칸)가 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세력을 키우더니, 결국 1449년 만리장성을 넘어 2만의 군대를 이끌고 명나라의 산시성에 쳐들어갑니다. 침략한 이유는 무역 분쟁 비슷한 것인데,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 황제 영종(정통제, 正統帝)은 5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에 맞서기 위해 직접 나서게 되고요.  그리고, 이제 중국 한족 역사의 비극 중 하나가 일어나는 서막이 오릅니다. 참고로 중국, 한족의 치욕적인 역사 중 하나인 정강의 변은 아래 포스팅을 참조하면 됩니다.

interstory.tistory.com/17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선조, 신라인 김함보 (1)

지난번 요하 유역의 요하문명과 관련해서 그 당시 만주 지역의 세력권과 고조선에 대한 포스팅을 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포스팅의 연장선상에서 금태조 아골타의 선조가 신라 출신이라는

interstory.tistory.com

영종(英宗) 정통제(正統帝)

선덕제(宣德帝)가 10년간 황제의 자리에 있다가 1435년 30대 중반의 이른 나이에 죽으면서 고작 9살의 나이였던 영종, 정통제가 즉위합니다. 이 정통제는 특이하게도 연호가 정통(正統)과 천순(天順) 두 가지인데, 그 연유는 뒤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이가 어린 황제가 즉위하다 보니 황제의 조모인 태황태후 장 씨가 섭정을 하게 되었는데, 태황태후가 신하들과 함께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사를 돌보았으나, 아첨에 능한 환관 왕진(王振)이 이 틈을 파고들어 정통제의 신임을 얻고 전횡을 일삼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명의 조정은 해이해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흔들리게 되고 국운이 기울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위에서 적은 것처럼 명나라와의 무역 분쟁에 이은 교섭이 결렬되면서 오이라트가 침략을 합니다.  그런데, 이 환관 왕진이 어이없게도 황제의 친정(親征)을 주장하는데요, 이 친정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통제는 이 왕진의 건의를 받아들입니다. (간신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위에 쓴 것처럼 오이라트와 명이 충돌하게 됩니다.

- 명나라의 6대 황제인 정통제,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

 

토목보의 변 (土木堡之變)

에센 타이시가 이끄는 오이라트 2만의 군대가 명나라 변방의 산시성을 공격하자 방어군들은 힘없이 무너졌고, 궤멸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군사 요충지인 대동(大同)이 함락되는데요, 이것은 그대로 두면 수도인 북경까지도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이때 위에 썼다시피 왕진의 건의를 받아들인 정통제가 5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전을 합니다. (참고로, 이 50만 대군이 약간 과장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 근거가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입니다. 1449년 8월 18일에 보면 황제가 군병 8만을 거느리고 친히 정벌하러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50만 대군이 문신들까지 모두 더한 데다가 훈련도 안된 오합지졸이었고, 그러다 보니 사기도 당연히 바닥이었죠. 지휘관이 무려 왕진이었으니까요.

 

예견된 일이었지만, 먼저 전쟁터에 도착하였던 선봉부대는 처참하게 대패하였고, 선발대의 전멸 소식을 들은 왕진은 그제야 사태 파악을 하고 회군을 결정합니다. 이때, 왕진은 자신의 고향인 울주를 경유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회군 경로를 크게 우회하는 억지를 부리게 되는데, (아래 이미지 참조) 왜냐하면 자신의 고향을 황제의 군대가 지나가게 되면 그 지역은 50만 대군의 보급으로 인해 황폐하게 될 테고, 혹시라도 오이라트 군대가 뒤쫓아오면서 그 지역을 지나치게 되면 입게 될 피해까지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왕진의 이 억지스러운 판단으로 인해 먼 길을 돌아가던 명군은 허베이성 화이라이현 주변의 토목보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토목보는 작은 요새에 불과한 곳인 데다가 물이 없는 곳이었는데, 그만 여기서 빠르게 추격해 온 몽골기병, 오이라트 군대에게 포위당하여 발이 묶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설마 50만 대군을 공격할까 했던 방심이 화를 부른 것입니다. 당연히 50만 명군은 큰 피해를 입고 그냥 박살이 나게 되는데, 이때 왕진은 번충이라는 장군이 화가 나서 휘두른 철퇴에 맞아 죽고 맙니다. 저라도 열 받았을 것 같습니다. 이때 정통제의 나이가 불과 22세였습니다. 그리고, 정통제는 생포됩니다. 이것이 바로 황제가 전쟁터에서 포로가 된 중국의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토목보의 변입니다. 우리는 항상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을 수가 있는데, 비선 실세가 불러온 참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토목보의 변 진행도, 울주를 우회하여 회군한다. 이미지 출처: 아시아경제 -

 

경태제(景泰帝)의 옹립, 그리고 정통제의 연호가 두 개인 이유

황제가 포로로 잡히고, 왕진은 목숨을 잃은 토목보의 변이 발생하자,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대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리고, 겁을 집어먹은 조정에서는 수도를 난징(南京)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는데, 병부시랑 우겸(于謙)이 나서서 북송이 어찌 망했는지 모른단 말인가 하는 예를 들며 북경을 사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리고는, 북경의 성문을 걸어 잠그고 병사들을 끌어모아서 방어태세를 정비하고 전쟁에 대비합니다. 그리고는 황제가 없으니 선덕제의 아들이자 정통제의 이복동생을 앞세워 명나라 7대 황제인 경태제(景泰帝)를 옹립하고, 비상 내각을 수립해서 본국을 수습한 다음, 쳐들어온 오이라트 군대로부터 총력을 다해 5일 동안 북경을 사수해 내는데요, 그야말로 명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엄청난 공을 세운 것이죠. 이렇게 북경을 사수해내자 이제 슬슬 명나라의 남쪽에서 북경으로 지원군들이 속속 몰려오기 시작하였고, 에센 타이시도 슬슬 전쟁에 대한 피로감이 누적되기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명나라에 정통제를 가지고 협상을 제의합니다. 하지만, 이미 경태제가 황제로 즉위한 마당에 정통제는 협상 카드가 될 수가 없는 상황이죠. 당연히 경태제 역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고요. 황제 자리를 돌려줘야 하는 건가 하는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겠죠. 하지만, 명나라 입장에서 정통제를 돌려받아야 그나마 체통이 설 수 있을 것이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경태제가 부득이하게 황제에 즉위한 만큼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신하들이 경태제를 설득합니다. 오이라트 역시 이미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였기 때문에 정통제가 협상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화의가 성립되면서 1450년에 조건 없이 명나라에 정통제를 송환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통제의 존재는 경태제에게 큰 위협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경태제는 송환된 정통제를 상황으로 올리는 예우를 하고, 남궁에 유폐하고 감시하게 됩니다.

- 북경을 사수해낸 우겸,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경태제는 나아가 정통제의 아들인 본래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까지 하게 되는데, 몇 년 후 주견제가 병으로 죽고, 1457년 경태제도 병에 걸려 드러눕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정통제의 세력들이 탈문의 변(奪門之變)으로 불리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다시 정통제가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리고, 천순제(天順帝)로 복위하게 되었고, 곧 경태제도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영종이 두 번을 즉위하게 되면서 정통(正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가, 복위 후에 천순(天順)으로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에 연호를 두 개 사용한 황제가 되었습니다.

 

우겸의 안타까운 최후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사실 우겸이 아니었다면 오이라트가 북경을 함락시키고 중원을 차지하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명나라를 구한 우겸은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에 의해 모함을 받아 황제를 구하기 전에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안타깝게도 역모죄로 처형이 됩니다. 정통제는 우겸을 사형에 처하고, 우겸의 가산을 몰수했으나 값나가는 물건이 하나도 없고, 곳간에는 경태제로부터 하사 받은 예복과 검 같은 무기뿐이었을 정도로 청렴하였다고 하죠. 이에 정통제는 우겸의 사형을 뒤늦게 후회했다고 하며, 이후 영종의 아들인 성화제() 때에 이르러 복권되었습니다.


덧. 참고로,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은 토목의 변이 벌어졌을 때 난징으로 천도하자고 주장하였던 서유정과 환관 조길상, 장수인 석형이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여러 번 횡포를 부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 셋은 이후에 서로 권력다툼도 벌이는 등 참 가지가지하는데... 우선 서유정은 권력이 커진 석형에 의해 운남으로 유배되고 서민으로 강등됩니다. 석형과 조길상은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황제가 적당한 꼬투리를 잡아 석형 부자를 투옥시켜 죽이고, 조길상도 양자인 조흠과 함께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제거되면서 이렇게 세 명의 공신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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