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가야의 건국자인 김수로왕의 세력이 북방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을 포스팅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포스팅은 가야가 북방문화뿐만 아니라 강력한 해양문화 역시 가지고 있었다는 내용을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고구려 위주의 사관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고대사에서 가야나 신라가 다소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없잖아 있습니다만, 우리 고대사에서 가야와 신라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융성한 나라였습니다.
2020/10/14 - [역사/우리나라] -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은 어디에서 왔는가 (1)
2020/10/14 - [역사/우리나라] -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은 어디에서 왔는가 (2)
일본 고유의 유물인 파형 동기가 대성동 가야 고분에서 발견된다.
김해의 대성동 고분의 88호분 무덤이 발굴되던 당시, 2012년 8월에 영남-규슈 고고학공동연구회를 통해 일본의 학자들과 언론들이 찾아옵니다. 왜 일본에서 가야의 고분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바로 파형 동기가 발굴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조선하면 비파형 동검을 떠올리듯이, 파형동기는 고대 일본의 천황 무덤에서만 발굴되던 유물이었습니다. 이 파형 동기의 용도는 방패에 사용되는 장식으로 보이는데, 스이지가이라는 조개를 본떠서 만든 것인데, 재액을 물리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유물이 김해 대성동 88호분에서 발굴이 되면서, 이제 일본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대성동 고분군에서만 발견이 되는 유물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수량도 많습니다. 참고로, 파형동기는 일본의 한 고분에서 최대 출토량이 10개인데 88호분에서만 12점이 출토됩니다. 이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해양강국 가야
고대 일본에서 만들어져 가야로 넘어온 파형동기는 가야가 왜와 활발한 교역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교역은 해상무역이었겠죠.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 해양세력을 떠올리면 모두가 신라의 장보고나 조선의 이순신을 떠올릴 겁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우리 역사 속의 김수로왕이 건국한 가야는 인근의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김해의 봉황동 유적지에서는 4세기 가야의 선박 배편 유적이 발견됩니다.
이 유물은 선박의 상단부로 추정이 되는데요, 선박의 형태를 가늠해 볼 때 배편을 통해 추정되는 선박의 크기는 최소 8-15m 이상일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 크기로 볼 때 인근 해역에서 단순 어로 활동을 위한 배라기보다는 일본 열도 등과 해상무역을 하였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김해평야는 낙동강의 퇴적이 오랜 기간 지속되어 형성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그 당시에는 김해만이었죠. 바다였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가야는 강력한 해양문화 역시 이룩하고 있었는데요, 삼국유사에서도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수로왕이 탈해를 술법으로 굴복시키다'를 보면 아래와 같은 구절이 등장합니다.
忽有琓夏國含逹王之夫人妊娠, 旀月生卵, 卵化爲人名曰脫解. 從海而來. 身長三尺頭圎一尺. 恱焉詣闕語於王云, “我欲奪王之位故來耳.” 王荅曰 “天命我俾即于位將令安中國而綏下民, 不敢違天之命以與之位, 又不敢以吾國吾民付囑於汝.” 解云 “若爾可爭其術.” 王曰 “可也.” 俄頃之間解化為鷹, 王化為鷲又解化為雀王化為鸇. 于此際也寸隂未移. 解还夲身王亦復然. 解乃伏膺曰, “僕也適於角術之場鷹之鷲, 雀之於鸇獲免焉, 此盖聖人惡殺之仁而然乎. 僕之與王爭位良難.” 便拜辝而出, 到麟郊外渡頭將中朝來泊之水道而行. 王竊恐滯留謀亂, 急發舟師五百艘而追之, 解奔入雞林地界, 舟師盡還. 事記所載多異與新羅.
이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임신을 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았고, 그 알이 화하여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하였다. 이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고 머리 둘레가 1척이었다.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고자 왔다”라고 하니 왕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한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러면 술법(術法)으로 겨루어 보겠는가”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사이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었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이때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탈해가 이에 엎드려 항복하고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겨루는 곳에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하였는데, 이는 대개 성인(聖人)이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져서 그러한 것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곧 왕에게 절을 하고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와서 정박하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마음속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난을 꾀할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국경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 출처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수로왕은 또 다른 해양세력인 탈해가 침략하자 물리쳤는데, 수군 500척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가야 건국 이전에 토착세력에게 이 정도의 대규모 함척이 있었다면 아마 기록에 있었을 테고, 순순히 김수로왕에게 통치당하진 않았겠죠. 김수로왕이 육로가 아닌 해양을 통해서 대규모 해군력을 이끌고 내려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는 대목입니다.
철의 제국, 가야
그렇다면 가야는 해상무역을 통해서 어떤 것들을 수출하였을까요. 바로 철기와 그 기술입니다. 당시 일본, 다시 말해 왜는 철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야로부터 철과 철기 제작 기술을 전수받았습니다.
가야의 철기 기술은 굉장히 뛰어났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압도하였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느냐 하면 풍부한 철이 이 지역에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해시의 진영읍 여래리에는 가야의 제철 유적이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제철의 불순물인 탄요뿐만 아니라 철광석 및 송풍관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추정할 때 전 공정이 일원적으로 갖추어진 생산체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유적이 신라의 철기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학설도 있는데, 나중에 다루어 보겠습니다.)
3세기 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보면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는데,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얻어갔다. 장사를 지낼 때는 철을 사용하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 곳에서 생산된 철이 낙랑과 대방(두 군)에 공급된다.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여기서 나라는 가야를 말하는데, 가야에서 생산된 철이 삼한과 더불어 낙랑과 대방, 그리고 일본까지 수출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고구려가 철을 보유하고 해상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가야를 정복하기 위해 침공하기까지 하는데요, 신라와 함께 가야는 이를 물리쳐냅니다. 이 부분도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다루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가야를 신라에 병합된 약소국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북방의 문화를 가지고 강력한 해양 문화와 결합시켜 철의 제국을 일으켰던 김수로왕과 가야는 고도로 발달된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고, 강과 바다를 끼고 있는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동북아 해상무역의 네트워크 거점으로 역사 속에 존속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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