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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우리나라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은 어디에서 왔는가 (2)

by Interesting Story 2020.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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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서 이어집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이 KBS 역사스페셜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2020/10/14 - [역사/우리나라] -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은 어디에서 왔는가 (1)

가야의 유물은 선비족보다 부여와 흡사하다.

중국 선양의 랴오닝성(요령성) 박물관에 가면 이 곳에서도 중국의 여러 유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선비족의 유물들로 알려져 있는 것들도 있는데요, 그런데 이 곳의 유물들이 조양 박물관의 선비족 유물들과는 다르게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굉장히 흡사하거나 똑같이 생긴 것들이 많습니다. 청동그릇과 동복(청동솥), 그리고 금동 허리띠 등이 거의 흡사합니다. 그리고, 이 유물들은 모두 라마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들입니다.

- 라마동 고분군의 유물들이 대성동에서 출토된 것들과 똑같거나 거의 흡사하다. 이미지 출처: KBS 역사스페셜 -

라마동 고분군은 1990년대에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400 여기의 무덤에서 수많은 부장품들이 출토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고대 국가들의 뿌리인 부여가 등장합니다.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에서 나온 나라입니다.) 이 라마동 고분군은 선비족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부여인의 무덤이라는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습니다. 라마동 고분군의 발굴을 지휘한 책임자, 요령성 문물국의 톈리쿤 교수도 부여의 무덤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바로 무덤의 형태가 일반적인 선비족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 선비족과 라마동의 묘 형태, 확연히 다르다. 이미지 출처: KBS 역사스페셜 -

위의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선비족의 묘는 앞은 넓고 높으며, 뒤는 좁고 낮습니다. 하지만, 라마동의 묘지는 앞뒤의 크기가 같은 직사각형 형태로, 대성동 고분과 동일하죠. 목곽묘 양식 역시 대성동 고분군과 일치합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 말안장도 선비족은 사각형 모양인데 반해, 라마동의 말안장은 타원형으로, 대성동의 68호분에서 출토된 말안장과 가은 형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라마동과 대성동은 같은 계통의 고분군으로 볼 수 있으나, 선비족과는 다릅니다.

- 말 안장의 형태가 대성동과 라마동은 비슷한 반면, 선비족과는 다르다. 이미지 출처: KBS 역사스페셜 -

선양시 문물고고학 연구소의 천산이라는 연구원이 라마동 순장 유골의 인골에 대해 형질인류학 분석을 한 논문이 있습니다. 형질인류학이란 유골의 모양과 차이를 분석해 계통을 나누는 것인데, 논문에서는 그 분석 결과를 가지고 유적의 주인공은 부여인이라고 결론을 냅니다.

- 라마동 유적의 유골에 대한 형질인류학 분석 결과, 부여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미지 출처: KBS 역사스페셜 -

가야의 지배계층은 부여인

한 때 동북아 일대를 호령하던, 강성했던 나라 부여는 3세기 말에 이르러 쇠락하기 시작하고, 4세기 초 선비족의 나라인 전연과 고구려의 견제를 받으면서 조금씩 약해져 갔습니다. 사서에는 346년에는 전연이 부여를 침략하여 5만 명의 포로를 끌고 갔다는 기록도 있는데요, 톈리쿤 교수는 라마동은 이때 포로가 된 부여인의 무덤이라는 설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 346년 선비족의 나라 전연이 부여를 침공하였다. 이미지 출처: KBS 역사스페셜 -

이제 부여인이 김해까지 내려왔을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여야 하겠죠. 346년 그 때의 전쟁 때에 부여족의 일파 하나가 전쟁을 피해 내려왔을 수도 있고, 전연의 침공으로 포로가 된 부여인들 중에 일부 지배층이 탈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 정황 상 가야의 지배계층이 부여인이라는 것은 충분히 제시할 수 있는 가설입니다.

 


대륙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은 김수로왕. 후에 가야는 결국 멸망하지만, 김수로왕은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후와 혼인하여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후손을 남긴 대종가의 시조로, 나라를 세워 번영시켰습니다. 삼국유사에 보면 사방이 안정되었고, 만백성이 태평하였다고 하지요. 후손도 끊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현실이 되었군요. 일연의 글귀에 나오는 금과 같은 그의 발자취요, 옥과 같이 떨친 그 이름이라는 말로 포스팅을 마칩니다.

 

世祖已下九代孫暦數委録于下, 銘曰. 元胎肇啓, 利眼初明. 人倫雖誕, 君位未成. 中朝累世, 東國分京雞林先定駕洛後營. 自無銓宰, 誰察民氓. 遂兹玄造顧彼蒼生. 用授符命特遣精靈. 山中降卵, 霧裏藏刑. 内猶漠漠, 外亦冥冥. 望如無象, 聞乃有聲. 羣歌而奏衆舞而呈. 七日而後, 一時所寧. 風吹雲卷, 空碧天青. 下六圎卵, 垂一紫纓. 殊方異土比屋連甍. 觀者如堵, 覩者如羹. 五歸各邑, 一在兹城. 同時同迹, 如弟如兄. 實天生徳, 爲世作程. 寳位初陟, 寰區欲清. 華構徴古, 土階尚平. 万機始勉, 庻政施行. 無偏無儻, 惟一惟精. 行者譲路, 農者讓耕. 四方奠枕, 萬姓迓衡. 俄晞薤露, 靡保椿㱓. 乾坤変氣朝野痛情. 金相其躅, 玉振其聲, 來苖不絶, 薦藻惟馨. 日月雖逝, 䂓儀不傾.

시조 이하 9대손의 역수(曆數)는 아래에 자세히 기록하니 그 명(銘)은 이러하다.
처음에 천지가 열리니, 이안(利眼)이 비로소 밝았다. 인륜(人倫)은 비록 생겼지만, 임금의 지위는 아직 이루지 않았다.
중국은 여러 대를 지냈지만, 동국(東國)은 서울을 나누어 계림(鷄林)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駕洛國)이 뒤에 경영(經營)되었다.
스스로 맡아 다스릴 사람 없으면, 누가 백성을 보살피겠는가. 드디어 상제(上帝)께서, 저 창생(蒼生)을 돌보았다.
여기 부명(符命)을 주어, 특별히 정령(精靈)을 보냈다. 산 속에 알이 내려오니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안은 오히려 아득하고, 밖도 또한 캄캄하였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듯하나 들으니 여기 소리가 있었다.
무리들은 노래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쳤다. 7일이 지난 후에, 한때 안정되었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이 맑게 개었다. 여섯 개 둥근 알이 내려오니, 한가닥 자색 줄에 드리웠다.
낯선 땅에, 집과 집이 연이었다. 구경하는 사람은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 우글거렸다.
다섯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남아 있었다. 같은 때 같은 자취는, 아우와 같고 형과 같았다.
진실로 하늘이 덕을 낳아서,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다. 왕위에 처음 오르니 온 세상은 곧 맑아지려 하였다.
궁전은 옛 법을 따랐고, 흙계단은 오히려 평평하였다. 만기(萬機)를 비로소 힘쓰고, 모든 정치를 베풀었다.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니, 오직 하나이고 오직 정밀하였다. 길 가는 자는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는 밭을 양보하였다.
사방은 모두 안정되고, 모든 백성은 태평을 맞이하였다. 갑자기 풀잎의 이슬처럼, 대춘(大椿)의 나이를 보전하지 못하였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모두 슬퍼하였다. 금과 같은 그의 발자취요, 옥과 같이 떨친 그 이름이었다.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영묘(靈廟)의 제사가 오직 향기로웠다. 세월을 비록 흘러갔지만, 규범(規範)은 기울어지지 않았다.

출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제 2 기이, 가락국기, 가락국의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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