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륙의 국가들과 맞섰던 고구려, 동아시아 다른 나라들과 교류하며 융성하였던 백제, 그리고 삼국을 통일하고 현재 우리나라의 정통성을 확립하여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신라. 우리가 우리나라의 고대사라고 하면 이렇게 세 나라가 있었던 삼국시대를 떠올립니다. 말 그대로 삼국시대(三國時代), 세 개의 국가가 있었던 시대입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 역사에 이렇게 삼국만 존재하던 시기는 100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여의 멸망이 494년, 가야의 멸망이 562년인데,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시점이 660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끔 고구려, 백제, 신라만 이야기하지만, 그 시대에 엄연히 가야라는 우수한 철기문화를 가진 나라가 500년 가까이 존속하였습니다. 참고로, 김유신(金庾信)이라는 우리 역사의 걸출한 장수 역시 이 가야의 왕실 핏줄입니다.
안타깝게도 가야의 역사는 기록으로 거의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만, 가야라는 나라를 빼놓을 수는 없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가야를 포함하여 사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부여까지 포함하여 오국시대, 또는 그 이전의 국가들까지 포함하여 열국시대(列國時代)라고 하기도 하고요. 오늘은 이처럼 삼국시대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가야에 대한 포스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야국의 건국 신화, 김수로왕
가야의 건국 신화는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나와 있는데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금관가야(金官伽倻)의 김수로왕(金首露王) 신화입니다. 구지가(龜旨歌)는 한 번쯤은 들어보셨겠죠.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은 그대로 가져오기에는 다소 길어서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백성 이삼백 명이 구지봉에 모여 있는데, 사람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이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구지가를 부르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대왕을 맞이해서 기뻐할 것이다.'
간(干)으로 불리는 추장 9명, 다시 말해 구간이 그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구지가를 부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그러자 자주색 줄이 땅으로 내려왔고 그 끝에 붉은 보자기에 둘러싸인 황금으로 된 상자가 있었습니다. 상자 안에는 황금알이 6개가 있었는데, 여느 난생 설화와 마찬가지로 다음날 알에서 아이들이 태어나죠. 그런 다음, 그 달 보름에 알에서 깨어난 아이가 왕위에 올랐는데, 세상에 처음 나왔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고, 나라를 가야국(伽耶國)이라고 일컫습니다. 나머지도 각각 동쪽, 서남쪽, 서북쪽, 동북쪽, 남쪽으로 가서 가야의 임금이 됩니다. 오늘날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진주의 고령가야, 고성의 소가야입니다.
건국 시기는 42년으로, 신라 유리왕 19년입니다. 이런 류의 건국 설화의 특징인데, 하늘에서 내려와 알에서 깨어난 사람이라는 표현을 해석하자면 하늘에서 온 사람은 보통 외부의 문명에서 선진 문물을 가져온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설화의 전체적인 구성은 구간으로 대표되는 토착세력이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 외부 세력과 함께 융화되어 새로운 국가가 건설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지요. 자, 그러면 토착세력과 연합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경남 김해시 대성동의 금관가야 고분군 발굴이 시작되다.
※아래 내용은 KBS 역사스페셜에서 많은 부분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에 위치한 금관가야 고분군에서 100 여기 이상에 이르는 금관가야 왕들의 무덤들을 1990년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있습니다. 이 곳은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사적 34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요, 이 곳에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가야사를 재조명하고 있고, 최근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신청된 상황입니다. (www.yna.co.kr/view/AKR20200922136900052)
안타깝게도 무덤의 주인인 주피장자가 묻혀 있던 곳들의 유물들은 발굴작업이 있기 전 이미 도굴되어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죠. 하지만, 순장자의 발치 아래에 부장품들이 남아 있었고요, 토기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무덤은 4세기 중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사실 이곳은 발굴이 되기 전에 주민들이 밭을 경작하던 곳으로 애꼬지라고 불렸습니다. 애는 아이, 꼬지는 구지, 즉 아이 구지봉, 새끼 구지봉이라는 뜻으로 제2의 구지봉이라는 뜻입니다. 구지봉이 어디인가요. 바로 김수로왕 신화의 그곳입니다. (대성동 고분군에서 600미터 위쪽에 구지봉이 있습니다.) 참고로 2010년 전국체전의 성화가 이 곳에서 채화되었고요.
대성동 고분군에서 북방문화의 유물들이 발굴되다.
대성동 고분군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굴이 되는데,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킵니다. 학계에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바로 가야인들이 북방의 유목민족으로부터 왔다는 증거들이 속속 발견이 된 것입니다.
대성동 29호분에서 출토된 동복, 다시 말해 청동솥은 말을 타고 이동생활을 하는 유목 민족이 음식을 조리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91호분에서는 재갈과 고삐를 연결하여 고정하기 위해 사용되던 금동 용문양 장식, 안장과 연결된 가죽끈에 장식한 청동 방울, 말의 후미에 달아 부와 권력을 상징하던 방울 등 말과 관련된 마구들이 대량으로 출토됩니다. 이러한 마구들은 가야인들이 북방의 유목민족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 중에 금동으로 된 말 장식 들은 한반도에서는 5세기에 이르러서야 금동 제품들이 출현한다는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것입니다. 4세기 중엽에 이렇게 금으로 세공된 물품은 신라나 백제에서도 없던 것들이죠.
91호분에서 조각난 사슴뿔 역시 출토되었는데, 이를 접착제를 사용하여 고정시키고 형태를 만들어내어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하단에 있는 연결 고리를 볼 때 머리에 고정시켜 관 대신 사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사슴과 관련된 것 역시 북방 유목민족의 문화와 관련이 깊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금관을 보면 사슴뿔을 형상화한 것이 명백하게 보이는데, 이 발굴을 통해서 신라 금관의 원형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수많은 순장 인골들이 출토가 되는데 순장 역시 북방 유목 민족의 문화입니다. (지난 거란 술률평의 이야기에서 순장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순장 풍습은 우리나라에서는 고대의 영남 지방에서 3세기 말에서 6세기 중엽 시기에 확인이 됩니다. 북방민족의 풍습이 특정 지역인 영남권에서만 특정시기에 확인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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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어느 정도 결론이 나오는데요, 가야의 문화는 북방 문화적 요소가 강하고, 건국자들은 북방문화에 기반을 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사람들이 많은 북방의 민족들 중 어느 민족인가라는 물음표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요, 일단 유물 자체가 북방의 선비족들의 유물과 흡사합니다. 말의 후미를 장식하는 용도의 말방울, 용무늬가 새겨진 금동 용문양 말 장식, 청동그릇까지 선비족의 유물들과 거의 유사한 모양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야인들은 선비족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가야의 역사는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유물로 시대를 해석하는 고고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중국에 있는 유물들을 확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가야의 유물은 선비족의 유물과는 미세하게 다르다.
중국 내몽고자치구에 선비족의 발원지인 알선동 유적지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한 때 중원을 차지하였던 선비족의 나라, 북위의 제3대 황제인 태무제(太武帝)가 남긴 축문이 있는데요, 하늘의 축복을 받아 흉악한 무리와 싸워 이겼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선비족의 조상이 알선동의 동굴에서 생활하다가, 3차례의 남하를 거쳐 중원에 도착했으며, 북위 왕조를 건립한 내용도 쓰여 있습니다. 선비족은 중국의 북방 유목민족 중 처음으로 중원에 발을 들여놓은 민족이자, 봉건제 왕조를 세운 민족입니다. 당시 북위 제3대 황제인 태무제는 호하, 북연, 북량 등을 모두 멸망시키고 화북 지역을 통일하면서 중국의 남북조 시대를 열었습니다. 과연 이 선비족이 가야인들과 어떠한 연관이 있을까요.
중국의 조양(차오양) 박물관에는 선비족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요, 선비족의 유물들을 보면 무언가 가야의 유물과 미묘하게 다릅니다. 선비족의 유물이 약간 디테일에서 투박한 데다가 재질 역시 청동으로 된 것들은 금동으로 된 대성동의 유물과 차이를 보입니다.
자, 그러면 가야의 북방문화적인 요소는 어느 민족에게서 온 것일까요. 좀 더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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