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에 가면 우리 역사 속에 걸출한 장수, 김유신 장군의 릉(능, 陵)이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릉이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신라의 장군이자 재상인 김유신은 신라의 왕족이 아니므로 릉이라는 표현보다 묘(墓)라는 표현이 맞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김유신은 사후에 흥무왕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릉이라는 표현도 틀린 표현은 아닙니다.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김유신, 그리고 왕릉보다 화려한 김유신 장군 묘 (흥무대왕릉)
김유신은 673년, 향년 79세로 죽고 162년 뒤인 흥덕왕 10년,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이 됩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 역성혁명을 제외하고, 부계 왕족이 아닌 일반 신하가 왕이 된 유일한 인물이죠. 최소한 제가 아는 한에서는 그런데, 아마 김유신 외에는 없을 겁니다.
김유신 장군의 묘를 보면 여타 신라의 왕릉보다 더 화려하게 단장이 되어 있습니다.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으로 김수로왕의 12대손이고,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자입니다. 경주 김씨인 신라 왕족이 아닌 금관가야의 후손인 김해 김씨 김유신의 무덤이 어떻게 이렇게 조성이 되었을까요? 바로 실로 엄청난 업적 때문인데요, 김유신이 없었다면 삼국통일도 없었겠고, 신라 역시 그 정도로 융성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었겠죠. 아래와 같이 부음을 슬퍼한 문무왕은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섬을 내려 장례에 사용할 정도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무덤을 정성을 다하여 꾸미게 됩니다.
격식을 갖추어 장사지내다 ( 673년 07월01일(음) )
대왕이 부음을 듣고 대단히 슬퍼하며 부의로 고운 빛깔의 비단 1천 필과 조(租) 2천 섬을 내려 장례에 사용하도록 하였고, 군악대에서 북 치고 피리 부는 사람 1백 명을 보내주었다. 금산원(金山原)에 나아가 장사지냈고, 담당 관서에 명하여 비를 세워 공적과 명예를 기록하게 하였다. 또한 민호(民戶)를 정하여 들여보내 묘를 지키도록 하였다.
大王聞訃震慟, 贈賻彩帛一千匹·租二千石, 以供喪事, 給軍樂皷 吹一百人. 出葬于金山原, 命有司立碑, 以紀功名. 又定入民戸, 以守墓焉.
그리고, 삼국사기에 보면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오는데요, 기록이 없어도 이미 고려시대에도 가축을 키우는 어린아이까지 김유신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을지문덕이나 장보고처럼 중국의 사서를 통해서 행적을 의존하여야 하거나 안시성주처럼 역사 속에서 이름이 사라질 염려 자체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 정도면 신라시대에는 그 유명함이 말할 필요도 없겠죠. 신라에서는 단순히 정치인이나 군인이 아니라 국민들을 이끄는 정신적인 지주였고,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던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張保皐)의 의롭고 용맹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흔적이 없어져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신은 나라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는 것이 지금[고려]까지 이어지며, 사대부들이 나는 것은 물론이고 꼴베는 아이와 가축을 기르는 아이까지도 그를 알고 있으니, 그의 사람됨이 반드시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臯之義勇, 微中國之書, 則泯滅而無聞. 若庾信, 則郷人稱頌之, 至今不亡, 士大夫知之可也, 至於蒭童牧豎亦能知之. 則其爲人也, 必有以異於人矣.
왕족이 아님에도 왕으로 추존이 될 정도였으니, 업적도 많고 우리 역사 속에는 김유신의 일화가 많이 전해지는데, 그중 천관(天官)의 집으로 향한 말의 목을 베었던 이야기나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부분과 같이 아주 유명하여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제외하고 김유신의 위엄을 알 수 있는 흥미로운 부분만 몇 가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참고로, 말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는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 나옵니다.)
김유신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기록
삼국유사에 보면 진덕왕 편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왕의 시대에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산(南山)에 있는 오지암(亐知巖)에 모여 나라의 일을 의논하였다. 이때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드니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섰는데 알천공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호랑이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어쳐서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아서 윗자리에 앉았으나 모든 공들은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王之代有閼川公·林宗公·述宗公·虎林公 慈藏之父·廉長公·庾信公, 㑹于南山亐知巖議國事. 時有大虎走入座間諸公驚起, 而閼川公略不移動談笑自若, 捉虎尾撲於地而殺之. 閼川公膂力如此䖏於席首, 然諸公皆服庾信之威.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진덕왕,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회의를 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뛰어들었고 이때 알천이 호랑이 꼬리를 잡고 땅에 메어쳐서 죽입니다. 그런데, 기록에 보면 사람들이 김유신의 위엄에 굴복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죠. 알천이 호랑이를 때려잡는 엄청난 상황에서도 알천을 넘어선 위엄을 보입니다. 당시 김유신의 카리스마가 엄청나다고 유추할 수 있겠죠.
삼국사기의 김유신에 대한 기록
삼국사기에는 본기와 지, 표 외에 열전이 10권이 있는데, 이 열전(列傳)이 김유신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총 69명이 이 열전에 소개가 되는데, 김유신이 41권에서 43권까지 상중하로 나누어서 무려 3권을 차지합니다. 나머지 68명은 7권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른 인물들은 한 권에 10명 정도씩 기록하였는데 말이죠. 김유신이 왕보다 기록이 훨씬 많습니다. 삼국시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 김유신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위에도 썼다시피 고려시대에도 모든 사람들이 김유신을 알고 있는 정도로 가장 유명한 인물입니다.
김부식은 논어의 ‘술이편(述而篇)’에 보면 ‘괴력난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子不語怪力亂神)’는 기준을 가지고 저술하였기 때문에 괴이하거나 초자연적인 현상은 기록하지 않았는데도 김유신이 태어난 기록을 보면 이건 거의 왕 수준입니다. 사실 모든 사서에 보면 왕들의 탄생에 이러한 내용을 붙여 신성을 부여하는데, 김유신은 왕이 아님에도 아래와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595년의 기록입니다.
[김]서현은 경진일 밤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 두 별이 자기에게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만명 또한 신축일 밤 꿈에 동자가 금으로 만든 갑옷[金甲]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태기가 있어 20개월만에 [김]유신을 낳았다. 이때가 진평왕 건복(建福) 12년(595년)으로 수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 을묘였다.
舒玄, 庚辰之夜, 夢熒或·鎮二星降於己. 萬明亦以辛丑之夜, 夢見童子衣金甲, 乗雲入堂中. 尋而有娠, 二十月而生庾信. 是真平王建福十二年, 隋文帝開皇十五年乙卯也.
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러면 삼국유사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요. 칠요의 정기를 품고 태어나서 등에 칠성문이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호력 이간(虎力 伊干)의 아들 서현 각간(舒玄 角干) 김씨의 큰 아들로 이름은 유신이며 아우는 흠순(欽純)이다. 맏누이는 보희(寶姬)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아해(阿海)이다. 그 아래 누이의 이름은 문희(文姬)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아지(阿之)이다. 유신공은 진평왕(眞平王) 17년 을묘(乙卯)에 태어났는데, 칠요(七曜)의 정기를 품고 태어났기 때문에 등에 칠성문(七星文)이 있었고 또한 신기하며 기이한 일이 많았다.
虎力伊干之子舒玄角干金氏之長子曰庾信, 弟曰欽純. 姊妹曰寳姬小名阿海. 妹曰文姬小名阿之. 庾信公以真平王十七年乙夘生, 禀精七曜故背有士星文, 又多神異.
삼국유사 기이 권1,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신라의 대문호였던 최치원은 시라(尸羅)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 시라가 신라의 국호라는 듯이 말을 합니다. 그리고, 북두칠성의 모양과 비슷한 모양인 시(尸) 자는 북두칠성 별빛 내릴 시의 의미로 북두칠성의 빛이 땅과 사람의 머리 위에 충만히 내린다는 뜻으로 해석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신라에 등에 칠성문이 새겨진 사람이 태어났다니, 무언가 그 탄생을 엄청나게 신화처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재미있습니다.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당나라의 장수인 소정방이 의자왕과 백제의 왕족들을 포로로 황제에게 바칩니다. 그러자, 당 고정이 소정방에게 왜 신라는 정벌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데 아래와 같은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습니다. 660년 9월의 일입니다.
[소]정방이 이윽고 포로를 바치니 천자가 그를 위로하면서
“어찌하여 신라는 정벌하지 않은 것인가?”라고 하자, [소]정방은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이 그 윗사람을 섬기기를 마치 아버지나 형을 섬기듯 하니,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사옵니다.”라고 말하였다.
定方旣獻俘, 天子慰藉之曰, “何不因而伐新羅.” 定方曰, “新羅, 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事其上如父兄, 雖小不可謀也.”
삼국사기 제42권 열전 제2,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열전의 김유신 편에 실린 기록이니 저 신하가 김유신을 일컫는 것입니다. 김유신이라는 훌륭한 신하가 있어 온 국민이 단합이 잘 되니 신라를 정벌할 수가 없다는 대답입니다.
김유신의 기록들을 보면 신비롭게 태어나서 엄청난 활약을 통해 업적을 쌓고, 사망을 하자 천신이 됩니다. 한 편의 신화를 보는 듯하죠. 왕이 아닌 사람에게 이 정도의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실 역사라는 것이 미화되기도 하고 과장되기도 합니다만, 왕과 신하들이 모두 믿고 의지한 인물, 매우 명석하고 군인이나 재상으로서 모두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었기에 많은 전설 같은 이야기와 기록들이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혹시 김유신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은 KBS 역사저널 그날의 2015년 11월 1일 방영분을 시청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목이 '킹메이커 김유신, 김춘추를 택하다'입니다. 왕인 김춘추가 신하 김유신을 택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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