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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우리나라

여요전쟁(麗遼戰爭), 만부교 사건과 서희의 담판

by Interesting Story 2020.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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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아래와 같이 거란의 나라인 요나라와 술률평에 대한 글을 작성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부족들을 통일하고, 916년 거란을 건국하였다가 2대 황제 태종이 요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고 소개하였는데요, 거란은 고려를 26년에 걸쳐서 무려 세 차례나 침입하였습니다. 이를 여요전쟁(麗遼戰爭, 고려-거란 전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당시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의 동아시아 정세를 재편하는 변화의 물꼬를 트는 사건이 됩니다.

2020/09/29 - [역사/중국] - 거란이 세운 요나라, 그리고 거란의 여인 술률평 (述律平, 순흠황후)

 

거란이 세운 요나라, 그리고 거란의 여인 술률평 (述律平, 순흠황후)

만주족인 여진이 세운 금나라와 청나라, 몽골제국의 칭기즈 칸으로 익히 알려진 원나라는 중원을 차지한 바 있고, 우리 역사와도 관련이 깊어 우리가 비교적 익숙하게 알고 있지만 거란족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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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십국 시대가 지나면서 이후 크게 보았을 때 북쪽의 거란, 남쪽의 송으로 대륙이 양분됩니다. 나무위키에 나온 1111년의 요나라의 영토를 보면 거란이 북방은 모두 차지하고 있고, 중원을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일부도 통치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강대하고 융성했던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죠. 사실상 거란의 군사력은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에 아시아 최강이 아니라 세계 최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1111년 요나라의 영토(연두색), 북방을 모두 장악하고 있다. 출처: 나무위키 -

이런 거란은 호시탐탐 중원 정복을 노립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영 찝찝합니다. 바로 고려 때문입니다. 송과의 전쟁에 몰두하다가 고려가 배후에서 침입이라도 하면 여간 낭패가 아닙니다. 그렇다 보니 거란은 고려를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만부교 사건, 고려는 거란과 전쟁도 불사한다.

위에 썼다시피 거란이 세운 요나라는 아무래도 중원 정복을 위해서는 고려를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942년 10월에 요나라 태종은 고려와 화친을 위해 사신 30명과 낙타 50마리를 보냈는데요, 왕건은 사신들을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고, 낙타들을 만부교 아래에 묶어 두고 굶겨 죽이는 것으로 답을 보냅니다. 사실 당시 요나라가 굉장히 강한 나라였음을 감안할 때 이해하기가 어려운 결정이죠. 이러한 대응은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것인데요, 왕건은 대체 왜 그랬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추정되지만, 메르스 때문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죠. 농담이고요,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아무래도 발해를 멸망시킨 것이 거란이었기 때문이라고 학계에서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는데, 고려는 발해의 유민들을 많이 받아들였고, 그들을 유입시켜 북쪽 변방을 안정화시킬 필요도 있었고요, 발해를 같은 민족의 나라로 인식한 것도 원인이 되겠습니다. 이런 것들로 미루어볼 때 거란에 대한 적대감이 굉장히 컸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고려는 후진과 동맹을 맺어서 거란을 공격하려는 계획까지 세울 정도였으니까요.

거란과의 국교를 단절하다

〈임인〉 25년(942) 겨울 10월 거란(契丹)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낙타 50필을 보냈다. 왕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渤海)와 지속적으로 화목하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이는 매우 무도(無道)하여 친선관계를 맺을 이웃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교빙(交聘)을 끊고 사신 30인을 섬으로 유배 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두니 모두 굶어죽었다.

(壬寅)二十五年 冬十月 契丹遣使, 來遣槖駝五十匹. 王以契丹嘗與渤海, 連和, 忽生疑貳, 背盟殄滅, 此甚無道, 不足遠結爲隣. 遂絶交聘, 流其使三十人于海島, 繫槖駝萬夫橋下, 皆餓死.

고려사, 태조 25년 10월, 출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 굶어죽은 낙타는 대체 무슨 죄.. 정치적인 이유로 희생된 낙타의 명복을 빕니다. -

만부교 사건이 발생하자 요나라는 그야말로 열이 받을 만큼 받습니다. 나라 사이즈도 크겠다, 북방민족인 만큼 기마부대도 막강하겠다, 후방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고려를 굴복시키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래야 마음 편히 중원도 공략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했다가 결국 거란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단서를 만들고 맙니다.

거란의 1차 침입

중국인들도 두려워하던 거란. 그 거란이 993년 10월에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합니다. 동경(현재의 랴오양)을 출발한 거란군은 파죽지세로 봉산군에 당도하고 첫 전투를 벌이는데, 고려의 선봉군 대장인 윤서안을 포로로 잡고, 봉산을 점령합니다. (봉산은 현재 청천강 부근으로 추정됨.) 그리고, 거란군은 기세를 몰아 안융진까지 진격합니다.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봉산군(蓬山郡)을 공격하여 우리의 선봉군사(先鋒軍使)인 급사중(給事中) 윤서안(尹庶顏) 등을 잡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려사절요, 성종 12년, 출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 봉산을 점령한 거란군은 기세를 몰아 안융진을 공격한다. 이미지 출처: KBS 역사스페셜 캡처 -

하지만, 여기서 대도수가 이끄는 고려군이 거란군을 방어해 냅니다. 참고로 대도수는 발해의 마지막 세자의 아들로 알려져 있는데, 발해 왕족의 후손으로 추정이 됩니다.

소손녕은 이몽전이 돌아간 지 오래되었는데도 회답이 없자 마침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였다.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와 낭장(郞將) 유방(庾方)이 맞서 싸워서 이겼다. 소손녕이 감히 다시 전진하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재촉하였다.

고려사절요, 성종 12년, 출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이 당시 고려의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과 항복과 함께 서경(현재의 평양) 이북의 영토도 일부 넘겨주자는 의견들이 많았는데(할지론), 서희는 이에 반대하였고, 대도수가 안융진에서 거란군을 방어해내면서 한번 붙어보자는 의견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추가 전투를 벌이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소손녕은 줄기차게 회담을 요구하였는데, 그 유명한 서희가 등장합니다. 이때의 기록이 사뭇 재미있는데요, 서희는 거란의 목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죠.

- 서희 표준영정, 이미지 출처: 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84%9C%ED%9D%AC_%ED%91%9C%EC%A4%80%EC%98%81%EC%A0%95 -

사실 거란의 목적은 송나라였고, 그 목적을 위해 후방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한 것이므로 굳이 고려를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저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거란을 섬기는 것을 원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런 동아시아의 정세를 잘 꿰뚫고 있던 서희는 이 회담을 통해서 강동 6주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 강동 6주의 하나가 바로 후에 그 유명한 귀주대첩의 귀주이고요, 압록강이 우리 민족의 역사로 다시 들어오게 되는 순간입니다.

서희가 국서(國書)를 받들고 거란의 군영으로 갔는데, 소손녕과 더불어 동등한 예로 대하면서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소손녕이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기면서 서희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新羅)의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의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도 너희들이 침범하여 갉아먹고 있다. 또 우리와 더불어 영토를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건너 송(宋)을 섬기고 있으니, 우리 대국(大國)이 이 때문에 토벌을 하러 온 것이다. 이제 영토를 나누어 바치고 조빙(朝聘)의 예를 취한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이니, 그렇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高麗)라고 하고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한 것입니다. 토지의 경계를 논하자고 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도 모두 우리의 영역에 있는 것이 되는데, 어찌 침식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압록강(鴨綠江) 안팎도 역시 우리의 영역 안쪽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를 도적질하여 기거하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변덕을 부리므로 길이 막혀 통하지 못함이 바다를 건너는 것 보다 더 심하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입니다.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돌려주어 성(城)과 보(堡)를 쌓고 길이 통하게 하여 준다면 감히 조빙의 예를 갖추지 않겠습니까. 장군께서 신의 말을 가지고 가서 천자께 전달하신다면, 어찌 불쌍히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말의 기운이 강개하므로 소손녕도 억지로 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마침내 그대로 갖추어서 아뢰니, 거란의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가 이미 강화를 요청하였으니, 마땅히 군사들을 철수시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출처: 고려사절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 거란의 1차 침임 때 서희의 담판으로 획득한 강동 6주,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

사실 강동 6주는 거란의 영토가 아니었고, 아무래도 어느 누구의 통치 지역이라고 보기에 애매한 지역이었는데, 고려가 이 지역을 차지하는 것을 거란이 용인해 주었다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거란도 고려가 송과 관계를 끊고 자신들을 섬기기로 한 데다가 자기들 영토를 주는 것이 아니니 크게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닌 셈입니다. 거란과 송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던 서희가 거란의 침입이 그리 거세지 않았던 것 등을 근거로 잘 꿰뚫어 보고 뛰어난 협상력으로 이루어낸 것이죠. 이렇게 거란은 1차 침입에서 물러가게 됩니다. 다만 고려도 송나라와 단교하고 요나라와 주종 관계를 맺게 되는데요, 요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공물을 바치고 성종 13년부터 연호도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게 되죠. 그리고, 실제로 강동 6주에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차지합니다.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다

거란(契丹)의 통화(統和) 연호를 처음 사용하였다.
始行契丹統和年號.

출처: 고려사,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하지만, 거란은 송을 굴복시키자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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