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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우리나라

표해시말_조선시대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에 다녀온 홍어장수 이야기

by Interesting Story 2020.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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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신안군의 우이도에 가면 볼 수 있는 홍어장수 문순득 동상

- 전라남도 우이도 위치, 구글 지도 캡처 -

위의 지도에서 표시된 섬은 전라남도 신안군의 우이도입니다. 다도해해상 국립공원에 속한 섬입니다. 사람 손을 많이 타지 않아 아름다운 섬이라고 하네요. 흥미로운 것은 그 섬에 가면 아래와 같이 홍어장수 문순득이라는 사람의 동상이 있고, 아래 비석에 '아시아를 눈에 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홍어장수의 동상이 왜 있을까? 그리고 아시아를 눈에 담다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럼 그 연유를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전남 우이도의 문순득 동상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41249) -


홍어장수 문순득(1777 - 1847)의 표류기

문순득은 조선 후기 전라남도 신안군의 작은 섬 우이도에 살고 있는 홍어장수였습니다. 흑산도에서 홍어를 사다가 나주에 내다 팔고, 나주에서 쌀과 여러 물건을 사다가 흑산도에 팔아 이문을 남겼죠. 1801년 12월, 스물다섯 살의 문순득은 작은 아버지를 포함한 마을 주민 다섯 명과 함께 홍어를 사기 위해 흑산도 남쪽의 태사도에 갔다가 1802년 1월 18일, 우이도로 돌아오는 길에 큰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됩니다. 그렇게 열흘 넘게 표류를 하다가 어떤 섬에 도착하게 되는데요,

 

바로 그곳은 류큐국(유구국, 琉球國)이었습니다. 현재의 오키나와죠. 

- 문순득은 풍랑을 만나 표류 끝에 류쿠국(현재의 오키나와)에 도착한다. -

류큐국은 당시 청나라와 일본에 조공을 바치고, 조선과도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행히도 류큐인들은 문순득 일행을 호의적으로 대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류큐국에서 9개월을 체류하다가 1802년 10월 류큐국에서 청나라로 가는 조공선에 몸을 싣게 됩니다. 당시 류큐국에서는 조선을 오가는 정기 배편이 없어 조선인들이 표류해서 오면 청나라를 통해서 조선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인데, 이때 조공 사절이 탄 두 척의 배와 문순득 일행 및 청나라에서 표류해온 사람들 및 류큐인들이 탄 한 척의 배까지 총 세 척이 청나라를 향해 떠났습니다. 이때의 계획은 조공선을 타고 청나라 푸저우에 도착한 후 육로로 북경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북경에 정기적으로 오는 조선 사신단에 합류하여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죠.

- 문순득 일행의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한 원래 계획, 하지만... -

하지만, 류큐국에서 청나라를 향해 출발한 조공선은 또다시 바다 위에서 비바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세 척의 배는 각각 흩어져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는데요, 문순득 일행이 탄 배는 표류한 끝에 어느 섬에 닿게 됩니다. 그곳은 바로 여송국(呂宋國)이었습니다. 여송은 루손의 한자어 표기인데, 현재의 필리핀 루손섬(Luzon)입니다.

- 문순득 일행은 청나라로 가지 못하고 필리핀 루손섬에 당도한다. -

당시 여송국은 조선이나 류큐국과 교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에서 내린 중국인들이 현지인들에게 붙잡혀 돌아오지 못하는 등의 일이 발생하였고, 피해가 우려되어 내리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 푸젠성 사람들이 모여사는 화교 마을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류큐국에서와 달리 이곳에서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여야 했기 때문에 상인들의 쌀 거래를 돕거나 새끼를 꼬아 파는 등 여비를 마련하면서 9개월을 체류하게 되는데, 그 기간 동안 파블로 대성당에도 방문을 하게 되죠.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여서 서양의 문화가 혼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1803년 8월 이번에는 마카오로 가는 상선에 몸을 싣습니다. 다행히도 1803년 9월 9일에 무사히 마카오에 도착하게 되고요, 육로로 중국 대륙을 종단하는데 남경을 거쳐 1804년 5월 북경에 당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사신들과 합류하게 되고 1804년 12월에 한양에 도착, 그리고 마침내 1805년 1월, 약 3년 2개월여의 시간을 떠돌다 고향인 전라남도의 우이도로 돌아오게 됩니다.

- 문순득 일행은 루손섬에서 상선을 타고 마카오로 이동하고, 육로를 통해 조선으로 귀국한다. -

문순득의 3년 2개월여에 걸친 이동 경로는 우이도 → 류큐국(오키나와) 여송(필리핀의 루손섬) → 마카오 → 북경 → 한양 → 전남 우이도입니다. 지도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네요.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면 오키나와, 필리핀, 청나라를 다녀왔다는 것이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 문순득 일행의 3년여에 걸친 이동 경로 -


그런데, 어떻게 조선 후기 홍어장수인 그의 표류기가 이토록 상세하게 남아있을까요?

 

고향으로 돌아온 홍순득은 다시 홍어 장수로 살아가게 되는데요, 홍어를 사기 위해 흑산도에 갔다가 신유박해(辛酉迫害)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와있던 손암 정약전과 만나게 됩니다. (참고로, 정약전은 다산 정약용과 한 때 제가 심취해서 좋아하던 인물 중 일인입니다.) 그리고, 정약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손암은 이 흥미로운 이야기, 한편으로는 굉장히 귀중한 이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글로 기록하게 됩니다. 그 책이 바로 표해시말(漂海始末)인데, 손암이 쓴 원본은 전해지지 않지만, 다산의 제자 이강회가 지은 유암총서에 95쪽의 분량으로 실리게 됩니다.

 

- 문순득의 5세손, 문채옥씨, 그의 집에서 표해시말이 발견된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cD8P8tMzlLU&list=PL7AE3D424D373EDB7 -

유암총서는 1979년 섬 민속연구를 위해 우이도를 찾았던 최덕원 전 순천대 교수가 문채옥 씨의 집 뒤주에 쌓여 있던 고서 더미를 뒤지다가 발견하여 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당시 문채옥 씨의 집 뒤 고서 더미에서 필리핀 말이 적힌 책이 나와 깜짝 놀랐다고 하죠. 책에는 당시 류큐국, 필리핀, 청나라의 여러 모습, 의복이나 풍속뿐 아니라 문순득이 습득한 류큐국과 여송어(필리핀 북부에서 사용되는 일로카노어)의 단어들까지 책의 말미에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류큐국의 언어가 오키나와에서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에 학술적 가치 역시 높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조선왕조실록 순조 9년에 문순득에 대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여송국(呂宋國)123) 의 표류인(漂流人)을 성경(盛京)에 이자(移咨)124) 하여 본국(本國)으로 송환(送還)시키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신유년125) 가을 이국인(異國人) 5명이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도착하였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오랑캐들의 말이어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나라 이름을 쓰게 하였더니 단지 막가외(莫可外)라고만 하여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자관(移咨官)을 딸려서 성경(盛京)으로 들여보냈었는데, 임술년126) 여름 성경의 예부(禮部)로부터도 또한 어느 나라인지 확실히 지적할 수 없다는 내용의 회자(回咨)와 함께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그중 1명은 도중에서 병이 들어 죽었다. 그리하여 우선 해목(該牧)에 머루르게 한 다음 공해(公廨)를 지급하고 양찬(粮饌)을 계속 대어주면서 풍토를 익히고 언어를 통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가운데 1명이 또 죽어서 단지 3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 사람 문순득(文順得)이 표류되어 여송국(呂宋國)에 들어갔었는데, 그 나라 사람의 형모(形貌)와 의관(衣冠)을 보고 그들의 방언(方言)을 또한 기록하여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그런데 표류되어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용모와 복장이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여송국의 방언으로 문답(問答)하니 절절이 딱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미친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차리고서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는 정상이 매우 딱하고 측은하였다. 그들이 표류되어 온 지 9년 만에야 비로소 여송국 사람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른바 막가외라는 것 또한 그 나라의 관음(官音)이었다. 전라 감사 이면응(李冕膺)과 제주 목사 이현택(李顯宅)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으므로 이 명(命)이 있게 된 것이다.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 6월 26일 을묘 1번째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906026_001

1801년 8월, 제주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표류해 옵니다. 당시 문순득의 표류기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이렇게 표류해온 외국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고 배를 수리해 주거나,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편을 알아봐 주는 등의 관례가 있었는데요, 이 다섯 명의 사람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도저히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길이 없어 수년을 그렇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09년 문순득이 만나보니 의사소통이 되었습니다. 바로 여송국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여송 사람들은 드디어 9년 만에 집에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공로로 문순득은 종 2품 가선대부 품계를 받게 됩니다.


국가 간의 정식 협약이나 교류가 없어도 표류민을 본국으로 송환해 주었던 19세기의 당시 관행도 흥미롭지만, 풍랑을 거쳐 표류하고, 타국까지 가서 살아남아 다시 돌아온 그 이야기가 정말 인상적입니다. 게다가 벼슬까지 받게 되고, 정약전을 우연히 만나 후대에 기록까지 남기게 되었으니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삶을 헤쳐나가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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