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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으로 보는 이석산 살인사건

by Interesting Story 2020.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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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산 실종 신고

조선 초기, 세조 1년 (1445년) 12월 12일, 이석산(李石山)의 종이 형조(刑曹)에 와서 주인이 실종되었다고 신고를 합니다. 이석산은 친구 신간(申澗)과 함께 놀러나갔는데, 여러 날이 지났음에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말이지요. 형조에서는 우선 신간을 참고인 소환하여 진술을 받았는데,

 

이석산 민발(閔發)의 첩 막비(莫非)와 몰래 간통(奸通) 하는 중이었는데... 나는 모릅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라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석산은 말썽이 많았던 왕실의 종친(공신의 후손)이었던 반면, 민발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라는 정3품의 벼슬인 데다가 세조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을 때의 공신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조선에서 가장 활을 잘 쏜다고 이름이 나 있었죠. 그러다 보니, 무인들을 아끼던 세조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글자도 읽지 못하는 민발이 정3품의 벼슬까지 하고 있었으니 가히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부정행위로 무과에 합격시켰다고 합니다.)

 

형조에서는 임금에게 보고를 하였는데, 임금은 민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신간과 막비를 의금부에서 조사를 해보라고 지시합니다. 민발을 보호하기 위해서였겠지요.

- 영화 관상 중, 무인의 기질을 가진 수양대군 -

이석산의 사체가 발견되고, 범인으로 민발이 지목되었지만 수사권과 기소권이 봉쇄된다.

조선시대 최고의 사법기관인 의금부에서 며칠 동안의 수색 끝에 한양의 반송정(盤松亭) 아래에서 이석산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창으로 찔리고 칼에 난자당한 상처들과 함께 눈이 도려져 있었으며, 혀와 함께 음경까지 베어져 있는 실로 참혹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요. 이건 누가 봐도 깊은 원한이나 치정에 의한 살인이죠. 이제 사건은 실종 사건이 아니라 살인 사건으로 발전하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목격자도 없고 뚜렷한 증거도 없으니 여러 포상을 내걸고 범인을 지명 수배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현상수배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석산(李石山)의 시체를 반송정(盤松亭) 밑에서 찾았는데, 칼로 난자(亂刺)하고 눈을 빼고 세(勢) 를 베어, 잔인함이 매우 심하였습니다. 사건을 모름지기 끝까지 밝혀 다스려야 하겠으니, 청컨대 이달 그믐 날을 한하여, 잡을 수 있게 고(告)하는 자가 있으면 사비(私婢) 백이(栢伊)를 살해한 사람을 고발한 예에 의하여, 양인(良人)은 2자급(資級)을 뛰어 올려서 관직(官職)을 상(賞)주고, 천인(賤人)은 면포(綿布) 1백 필을 주고, 수죄(首罪) 이외에 종범(從犯)으로 자수한 자는 죄를 면해 주고, 이웃 관령(管領)으로 사실을 알고 고발하지 아니하는 자는 전 가족을 변방에 옮기게 하고, 이것을 중외(中外)에 두루 유시(諭示)하소서."

-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12월 16일,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112016_001 -

그런데, 세조는 현상수배와 조사에 대해서는 명령을 내렸지만, 유력한 용의자인 민발을 보호하기 위해 동부승지(同副承旨) 이휘(李徽)에게 명하여 의금부와 같이 복검(覆檢, 일단 초검(初檢)한 시체를 중앙의 관원이 다시 검시(檢屍)하여 조사하던 것)을 지시합니다. 발견된 시체가 정말 이석산이 맞느냐는 것이지요.

 

형조를 담당하던 동부승지 이휘는 어명에 따라 이석산의 시체를 복검하고, 신원을 이석산이 확실한 것으로 결론짓습니다. 그리고, 살해 현장으로 추정되는 막비의 집을 조사하였는데, 막비의 집 곳곳에서 피를 처리한 의심스러운 흔적이 발견되고, 집안에서 찾아낸 철창의 날이 이석산의 사체에 남아 있던 자상의 형태와 일치하는 것을 알아냅니다.

 

이 정도면 막비의 집에서 이석산이 살해당한 것이 거의 확실한데다가, 민발의 첩 막비와 이석산이 간통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민발이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세조는 민발과 막비를 구속하여 심문하자는 신하들에게 아래와 같이 불구속 수사를 명령합니다. 민발은 다시 풀려납니다. 그리고, 승정원에는 어느 정도로 처벌해야 하는지 물어봅니다. 속이 뻔히 보이죠.

"민발은 지위[位]가 재상(宰相)에 이르렀고, 또 원종(原從)의 공(功)이 있으니, 의심스러운 일로 몸을 구속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민발의 소위(所爲)라면, 민발은 원종 공신(原從功臣)인데, 어떤 율(律)로 과죄(科罪)할 것인가?"

하지만, 승정원에서는 민발이 공신이지만, 이석산 역시 공신의 후손이므로 감형은 불가하다고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세조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상한 이유를 들며 다시 조사를 하고, 다시 현상 수배를 하라고 합니다.

 

세조는 민발을 무죄로 만들고 싶어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12월 27일 무진 3번째 기사, 의정부에 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 공신에 녹훈하다.

12월 27일, 의정부에 어명으로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운 자들에게 녹훈을 내리는데, 이 공신의 명단에 민발이 포함됩니다. 

- 원종 공신에 녹훈된 리스트에 민발이 포함됨,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12월 27일, 출처: http://sillok.history.go.kr/popup/viewer.do?id=kga_10112027_003&type=view&reSearchWords=&reSearchWords_ime=

이쯤 되면 세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지요. 바로 민발의 무죄입니다. 뭐, 요즘 시대라고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권력자의 의지를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건을 덮는 세조

아래 내용은 세조 2년 1월 12일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임금의 의지가 개입되다 보니 이석산 살인사건은 그냥 묻혀 버립니다. 그리고, 세조 2년 (1456년), 1월 12일 궁궐에서 새해를 맞아 잔치가 벌어지는데, 동부승지 이휘가 이 사건을 술기운을 빌려 다시 거론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용기가 안 날 때는 술이 최고인 듯 합니다.

 

이에 세조는 민발이 한 짓이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만, 대신들이 모두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어떻게 요즘의 상황과 오버랩이 됩니다. 이때 실록에는 집의(執義) 이예(李芮), 지평(持平) 윤자(尹慈), 좌헌납(左獻納) 구종직(丘從直)이 등장하는데, 구종직이 재조사를 해야 한다는 둥, 이석산의 사건에 관련된 사람을 방면하면 안 된다는 둥 말을 늘어놓자 세조는 듣기 싫은 나머지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에게 명하여 구종직을 그냥 끌어내 버립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하고 뭐고 없습니다. 이것 역시 요즘의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이 됩니다.

 

그리고, 세조는 민발이 범인이 아니므로 범인을 빨리 잡으라고 합니다. 의정부에 전지(傳旨)하기를, 현상금도 높이고 상을 줄테니까 신고하라고 합니다. 민발이 범인인데, 무슨 수로 다른 곳에서 범인을 잡으라는 것인지 대신들은 답답할 노릇입니다.

 

세조 2년 1월 13일 : 좌헌납 구종직이 술에 취하여 실례하였으니 대죄하게 해달라 아뢰니 세조가 관작을 1자급 더 올려줍니다. 입 다물고 있으면 보상해준다 이런 의미 같습니다.

 

세조 2년 1월 14일 : 세조가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았는데, 동부승지 이휘가 민발이 이석산을 죽인 것이 분명하니 재조사하여 벌을 주자고 하였는데, 세조가 이휘를 파직해 버립니다. 거슬리니까 그냥 자른 겁니다.

※ 참고로 공신이었던 이휘는 이후 단종의 복위를 꾀한 사육신 사건에 가담하여 거열형으로 처형당합니다. 거열형은 소나 말을 이용하여 몸을 찢어 버리는 사형 방법입니다.

 

세조 2년 1월 24일 : 삼절린이라고 범죄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사건이 난 바로 이웃에 사는 세 집과 한성 오부에 속해 있던 각방(各坊)의 우두머리들까지 고문 취조하였는데도 제보가 없어 세조가 삼절린과 각방의 우두머리들에게는 다시 묻지 마라고 합니다.

 

사건이 이상하게 해결되지만, 개운하지 않다.

중국 황제의 조칙과 고명을 받고, 중국 사신에게 하마연을 베풀다.

중국에서 세조의 즉위에 대한 조칙과 고명을 내리고 하마연이 열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건이 터집니다. 요약하자면, 민발이 술을 꽤나 많이 마셨는지 세조의 동생인 임영대군에게 시비를 걸었는데, 임금이 제지하는데도 계속 불손하게 행동을 하다가 세조가 손까지 잡으면서까지 제지하게 됩니다. 곤장까지 몇 대 치고는 의금부에 하옥시킵니다. 그리고는 세조의 입에서 이석산을 죽인 자가 민발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네가 이석산을 죽였어도 내가 보호해줬다'는 뉘앙스의 말을 한거죠. 이 사건은 임금의 입에서 이렇게 말이 나왔으니 그냥 이렇게 해결이 됩니다. 아래 세조 2년 4월 20일의 기록을 보시죠.

겸사복(兼司僕) 민발(閔發)이 임영 대군(臨瀛大君)의 말을 막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 임금이 민발을 불러 제지(制止)하였으나 민발이 듣지 않았다. 임금이 굳이 명하여 제지한 뒤에야 곧 그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바야흐로 명을 굳게 거역하였으니 너의 죄가 크다."

하니, 민발이 자기가 옳다고 굳이 고집하며 언사에 불손(不遜)함이 많았다. 임금이 민발의 손을 잡고 반복하여 개유(開諭)하니, 민발(閔發)이 취한 체하며 광화문(光化門) 안에 이르렀다. 호군(護軍) 황석생(黃石生)에게 명하여, 민발에게 장(杖) 몇 대를 치게 하고 묻기를,

"네가 오히려 명을 어긴 잘못을 깨닫지 못하겠느냐?"

하니, 민발이 오히려 취한 체하고 자오(自悟)하지 못한 자같이 하며, 경솔하게 아뢰기를,

"조효문(曹孝門)이 신으로 하여금 이구(李璆)를 붙들어 내라고 하였으니, 신은 참으로 죄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다른 사람을 무고(誣告)하여 끌어대느냐? 비록 조효문(曹孝門)이 너를 시켰더라도 내가 그치기를 재삼(再三) 하였어도 따르지 않음은 어찌 함인가?"

하고, 또 명하여 장(杖)을 치게 하고, 드디어 의금부(義禁府)에 하옥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민발은 완악(頑惡)하기 짝이 없다. 일찍이 대죄(大罪)를 범하였으나, 내 그 재주를 아껴 상서(上書)하여 구활(救活)하였고, 또 이석산(李石山)을 죽여서 온 나라가 다투어 죄 주기를 청하였어도 내가 허락하지 아니하였었다. 이제 개전(改悛)하지 않음이 이같으니, 만약 유주(幼主)를 만났다면 무엇을 꺼리겠느냐? 저자[市]에서 참(斬)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하지만, 4월 21일의 기록을 보면, 하마연에서 술주정한 민발을 유배합니다. 아니, 계유정난을 일으켜 안평대군과 김종서도 죽이고, 조카인 단종까지 살해한 세조가 민발을 죽이지 않고 유배를 보내는군요.

 

4월 22일, 장령 김서진이 민발이 지은 죄가 중하니 법대로 하자고 하는데, 세조는 이미 적당하다고 대답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끝까지 감싸고돕니다.

 

나중에 사면되었는지 세조실록에 다시 벼슬을 가지고 등장합니다. 게다가 성종 때 여산군(驪山君)으로 봉해지기까지.. 그리고 민발은 성종 13년 64세의 일기로 사망합니다.


혹시 민발에 대해 관심이 생긴 분들은 아래 포스트도 보시면 재미있습니다. 장수찬 화백의 역사툰인데, '까막눈 무반재상, 민발 이야기'입니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1824226&memberNo=17094144

 

까막눈 무반재상, 민발 이야기

민발은 수양대군의 심복으로 행동하다, 계유정난을 통해 벼락출세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민발이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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