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알게 모르게 만주에 대한 일종의 향수랄까, 역사적인 아쉬움이 있습니다.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한 때는 우리가 지배했던 우리 역사 속의 영토인데, 아무래도 현재는 중국의 영토이다 보니 그곳의 역사들도 중국의 역사로 상당 부분 편입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를 중심으로 한 요하문명(遼河文明)은 우리 민족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약간 국뽕에 취해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 본 포스팅의 많은 부분은 2009년 8월 29일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제5의 문명, 특별기획 만주 대탐사, 요하를 가다'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요하문명
중국 동북부, 만주에는 요하(랴오허)라는 강이 있습니다. 내몽골 자치구와 허베이성, 지린성 등을 지나며 황해와 발해로 흐르는 큰 강인데, 이 강을 경계로 요동과 요서를 구분합니다.
이 요하 유역에서는 20세기 초부터 많은 유물이 발견되는데요, 1980년대에 내몽골 자치구 내의 우하량 홍산 지역에서 여신상, 여신묘, 원형 제단과 적석총이 발굴됩니다. 그리고, 시기는 놀랍게도 무려 BC 4000 - 3000년경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 시기가 왜 놀라우냐 하면 기존 중국에서 가장 앞선다고 여겼던 황하문명이 BC 2000-1500년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황하문명보다 천년 이상 더 앞선 문명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유적이 발견된 것이죠. 황하문명은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과 함께 소위 말하는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이고, 그중 가장 늦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더 이른 문명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단서가 중국 영토 내에서 발견되었으니 중국 입장에서도 무언가 당황스러우면서도 입장 정리가 필요해집니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루겠습니다.
초기 국가 단계, 초기 문명 단계로 이미 진입
이때 우하량에서 발견된 유적 중에 3단의 계단식 적석총(돌무덤)들이 있는데, 제단은 원형이고 무덤은 사각형입니다. 그런데 적석총은 중원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형식입니다. 그리고, 그 근방에서 27개의 석관들이 함께 발굴됩니다. 석관묘는 한반도와 요동반도, 시베리아를 걸치는 북방 벨트를 따라 발견되는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의 묘제 형식입니다. 한반도에서는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전역에서 발견되고요. 그런데, 이번에 우하량에서 발견된 석관묘는 5500년 정도 전으로 추정되므로 시베리아보다 2천 년 앞선 시기로 추정됩니다. 북방전래설에 근거하여 적석총의 기원은 시베리아라는 학설과 배치됩니다.
우하량 전역에서 주거지는 발견되지 않고, 무덤과 제단, 신전들만 발견됨에 따라 이 지역은 홍산인들의 성지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것들이 건설되려면 무언가 강한 권력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하량 적석총의 유골 옆에는 옥이 함께 발견됩니다. 그런데, 저런 옥기는 현재의 기술과 장비를 이용하여 제작하여도 쪼고, 갈고, 광을 입히는 공정이 필요해서 열흘 정도는 소요되는데, 저 시대에는 최소 1-2년, 길면 수년에 이르는 시간을 들여서 갈아야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옥기를 만드는 전문 장인 집단이 이미 분화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이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옥기를 소유하고 제사를 올리는 권력 계층이 있었다는 것이 이미 신분이 분화되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여신묘와 원형 제단, 적석총의 유물들로 미루어볼 때 황하문명보다 천년 이상 앞선 홍산문화가 이미 초기 국가 단계나 초기 문명 단계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 시작, 요하문명을 자국의 역사로 편입
자, 이제 중국은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중국에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이 있는데, 이 중화사상에 따르면 당연히 이민족이 있던 지역은 중원의 영향을 받아 발전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북적, 동이, 서융, 남만이라고 들어보셨겠죠. 그리고, 중국은 예로부터 보통 중원과 북방을 구분할 때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삼는데, 만리장성 너머에 사는 북쪽 오랑캐의 소굴(?)에서 중원의 황하문명보다 앞선 시기의 선진적인 유물이 발견되고 출토되자 자기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자, 이제 중국 입장에서는 저 지역도 현재 자신들의 영토이니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을 시켜야 합니다. 뭐 자국중심주의는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중국은 중화문명의 기원지로 오랫동안 황하문명을 이야기해오고 있었는데, 어느새 장강 문명까지 포함하였고 서서히 요하문명까지 편입시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면 중화문명을 천년 이상 앞당길 수 있게 되기 때문인데, 그리고, 중화문명의 기원은 황하문명 하나가 아니라 여러 곳이라는 다기원론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북경의 서북쪽에 탁록현에 가면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 1997년 건립)이라는 사당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중화민족의 세 조상을 모시고 있다는 곳인데, 그 세 조상이 황제, 염제, 치우입니다. 황제는 중국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삼황오제의 그 황제고요, 염제는 염제신농씨, 치우는 그 치우천왕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중국사람들은 원래 황제가 한족의 유일한 조상이라고 오랫동안 받들어왔고, 나중에 삼황오제 전설에 따라 염제를 끼워 넣었는데, 원래 군신으로 알려진 치우는 중국에서 시조는커녕 좋은 대접을 받던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닙니다. 중국 사서에서도 황제와 싸운 인물이기에 그 성격이 포악하여 전쟁을 좋아한다는 둥 마치 반역자나 악당을 다루듯이 부정적인 묘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하문명이 발견됨에 따라 황제와 염제는 한족의 시조로, 치우는 소수민족의 시조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조상과 박 터지게 싸우던 치우를 중국의 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중국이 고수하는 입장은 어찌 보면 한결같은데, 중국의 영토 안에서 일어난 이민족들의 역사 역시 중국의 역사라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이제 요하 지역도 황제의 땅이었고, 그 황제의 땅인 요하 지역에서 문명이 발생한 다음 황하와 장강에서 문명이 꽃피웠다는 스토리를 만들어갑니다. 중국문명의 실질적인 기원지가 요하라는 역사 재편 작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동북공정의 핵심이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요하문명과 중원의 문명은 이질적인 부분이 너무 많아 저렇게 단순하게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요하문명은 어떤 세력이 있었던 것일까요.
BC 6000년부터 이미 중원과 독립적인 문화를 형성
중국 요녕성의 사해(査海) 유적은 중국 영토 내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 유적인데, 여기서 57기의 주거지가 발굴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57기의 주거지가 돌로 만든 용 형상을 감싼 형태로 마을이 이루어져 있는데요, 농경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유물들이 다수 발견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빗살무늬토기도 발견되는데,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와 제작 방법이나 태토가 흡사합니다.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와 요하 유역에서는 발견되지만, 황하 유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는 BC 6000년부터 이미 만주 지역은 중원과 관계없이 별도로 구분되는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내몽골 자치구 내의 흥륭와 유적 역시 신석기 시대인 BC 6000년 정도로 추정되는데, 흥륭와 문화 역시 사해유적과 마찬가지로 홍산문화로 이어지는 요하 문명으로 간주되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주거지 약 150기가 마치 계획도시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흥륭와에서 발견되는 옥(玉, Marble) 유적이 압록강 유역에 있는 수암산의 옥과 색깔 및 경도가 모두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리고, 강원도 고성에서 이 것과 똑같은 옥 귀걸이가 발견됩니다. 빗살무늬토기에 이어서 옥 유적도 흡사해서 이 지역들이 같은 문화권일 가능성이 점점 높아집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던 검파형이나 방패형의 암각화가 요하문명 일대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요하 문명은 중원과는 이질적이고 독자적인 문명이었던 반면, 한반도와 만주가 같은 문화권으로 깊은 연관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요하문명은 중원의 문명이 아니라 우리 문명의 시원일 가능성이 더 높을 수가 있습니다.
그 시기, 그 지역에 있었던 국가, 고조선
BC 2000년경의 성자산성 유적을 보면 요하 문명에서 시작된 70개 이상의 많은 성들을 볼 수 있는데 이로 미루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며, 어떤 제도나 시스템이 존재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국가의 형태입니다. 그리고, 이 요서 지역에 있었던 국가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사서들을 통틀어서 고조선이 유일합니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에 따르면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BC 2333년)
≪고기(古記)≫註 248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 제석(帝釋)을 말한다.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하(天下)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白)註 249을 내려다보니 인간(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註 250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웅(雄)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 즉 태백(太伯)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註 251이다. 신단수(神壇樹;神檀樹)註 252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고 이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악(善惡) 등 무릇 인간의 삼백육십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에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註 253 항상 신(神) 환웅(雄)에게 기도하되 화(化)하여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이에 신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百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이 될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받아서 먹어, 기(忌)한지 삼칠일(三七日)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하지 못해서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양 단수(壇樹;檀樹)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였다. [웅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壇君王儉;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당(唐)의 고(高)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 당의 요(堯)임금 즉위 원년은 무진(戊辰)인 즉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이 아니다. 사실이 아닐까 의심스럽다.으로,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서경(西京)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아사달에 옮겼는데, 궁(弓) 혹은 방(方)이라고 한다.홀산(忽山)이라고도 하며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호왕(虎王-武王-)註 254이 즉위한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註 255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으니 수(壽)가 1,908세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출처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sy_001r_0020_0020_0020
卷 第一 > 제1 기이(紀異第一) >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 환웅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다
그리고 모두가 잘 알다시피 환웅이 웅녀를 만나 단군을 낳고,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는데, 이것은 곰 토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요.
그런데 우하량의 여신묘에서 곰발과 곰 턱뼈 형태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홍산인들이 여신뿐만 아니라 곰에게도 제사를 지낸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곰을 숭배하였다는 반증입니다. 그리고 홍산 문화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옥기가 바로 곰을 형상화한 웅룡입니다. 고조선과 무언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죠.
중국의 요령성 조양현은 중국 역사상 한족과 북방민족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인데, 이곳에서 비파형 동검이 대거 출토됩니다. (십이대영자 유적) 그리고,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을 상징하는 유물로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기원전 10세기, 동아시아의 세 문화를 구별 짓는 기준이 청동검인데, 이 청동검의 형태가 그 지역적 문화의 특색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비파형 동검은 북방식 동검이나 중원식 동검과는 몇 가지 특징적인 요소가 있어 확연히 구별되는데, 비파형 동검의 가장 큰 특징은 검 몸체와 손잡이가 분리되어 주조되었습니다. 고조선이 있었던 만주 지역과 한반도까지 시종일관 나타나는 형태는 비파형 동검이고, 주나라 지역에서 시종일관 나타나는 청동검은 직인검입니다.
※ 비파형동검을 요령식 동검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한반도에서도 많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요령이라는 지역 명칭은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장장 3년에 걸쳐서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고조선에 대한 합동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조중합동발굴조사) 그리고 1963년 당시 중국 정부는 요서지역, 만리장성 부근까지 고조선의 영역임을 인정하였고요. 사실 중국도 요하문명 지역이 고조선의 영역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선사 문명이 그간 시베리아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알고 보니 시베리아보다 빠르고 선진적인 문명이 요하 서쪽인 요서 지방에 있었고, 이게 고조선의 영역인 것입니다.
이렇다면 우리 민족의 기원을 요하 한 지역에만 둘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요하 문명의 세력이 우리 민족을 구성하는 한 원류라고 하는 것은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삼좌산 산성 유적에서 고구려성의 특징인 치(雉)가 발견된다.
2007년 발굴 완료된 적봉시에 있는 삼좌점 산성, 성벽이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고, 건물터 역시 수십 군데 발견됩니다. 그리고, 성의 내부는 원형과 사각형의 제단으로 채워져 있는데, 성벽에 13개의 치가 보입니다. 그런데, 이 치라는 것은 고구려성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치가 무엇인지 아래의 설명과 사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산성의 치는 성벽에서 접근하는 적을 일찍 관측하고, 전투를 할 때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면과 양쪽 측면에서 공격하여 격퇴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내어 쌓은 것을 말한다.
출처: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ti/view.do?tabId=02&code=ti_ty_010_060&subjectId=0&levelId=ti_005_0080#self
삼좌산성 유적은 치가 보이는 것을 보니 고구려와 같은 축성 방식을 사용한 것으로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요서의 고대인들 대부분이 고동북형(古東北形)
길림대에서 요서지역 유골의 체질인류학적 분석을 한 적이 있는데, 연구결과 두 개의 종족이 보이고, 그중 고동북형이 2/3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요서지역 고대인들의 60% 이상이 중국보다는 우리나라와 친연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위의 내용들을 종합할 때 요서 지역의 문명은 우리나라의 선조들이 세운 문명일 것으로 강하게 추정됩니다. 그리고, 거대한 성을 축조하고 대륙을 호령하던 국가는 고조선이었을 확률이 매우 높죠.
연산에서 30여 개의 묘가 한꺼번에 발견되었고, 연나라의 청동기가 대거 출토됩니다. 그런데, 그 무덤이 적석총인 데다가 비파형 동검 역시 출토되었습니다. 연나라 장수가 고조선을 침입하였다가 정착하면서 고조선 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하는 주장이 있는데, 이 곳의 유물들이 중국 사서의 기록들과 대체로 일치합니다.
『위략(魏略)』에는 소왕(昭王, 기원전 311~279) 대인 기원전 4세기 경에 연나라와 각축을 벌이던 고조선이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공격을 받아 서쪽 2천여 리의 땅을 잃고 그 중심지를 동쪽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적어도 기원전 320년을 전후하여 연을 비롯한 중국은 고조선을 스스로 왕을 칭한 강력한 국가로 보았다. 진개는 기원전 300년경 동호(東胡)를 격파하고 기원전 280년경에는 고조선을 침략해서 만번한(滿潘汗: 고조선시대 중국의 연과 경계가 된 지역의 명칭)을 설치했다고 기록돼 있다. 실제로 연나라의 수도인 연하도에서 진개의 활동과 관련된 자료가 발굴되었다. 바로 연하도 유적의 신장두(辛庄頭) 30호 묘이다. 이 무덤에서는 한국식 꺽창과 중앙아시아와 흉노계통의 금장식도 출토되었다.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와 고조선에서 전쟁을 했다는 기록과 부합된다.
출처: 문화재청 웹사이트
춘추시대, 연나라 장수 진개가 오만 병력으로 조선땅 이천리를 진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과 유적을 참고한다면 진개 공격 이전에 여기가 고조선의 영역이었음을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만리장성 바로 앞 연산 산맥까지 고조선의 강역이 이른 것인데, 연산 산맥이 고조선과 중국을 나누는 경계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하량의 거대 피라미드 적석총
우하량에는 외벽은 석축을 쌓고 내벽은 흙으로 쌓아 올린 가로, 세로 60미터에 이르는 거대 피라미드 형태의 적석총도 있는데, 산 전체가 적석총인 셈입니다. 시기적으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천년 정도 앞섭니다.
그런데, 유적을 토대로 추정한 복원도를 보면 장군총과 굉장히 흡사합니다. 그리고 이 일대에 이런 형태의 적석총이 많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적석총은 한반도와 요서 일대에 집중 분포하는 지역적 특색이 뚜렷한 유적임은 위에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위의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요하문명은 동북아시아의 시원 문명임과 동시에 몽골, 만주, 한반도와 일본으로 이어지는 북방문화의 유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과 매우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되죠.
만주는 더 이상 우리나라의 땅이 아닙니다만 그 역사는 우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수천 년 전 우리 민족의 원형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고, 우리 민족의 고향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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