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요하 유역의 요하문명과 관련해서 그 당시 만주 지역의 세력권과 고조선에 대한 포스팅을 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포스팅의 연장선상에서 금태조 아골타의 선조가 신라 출신이라는 설에 대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실 이 부분이 정리되면, 만주 지역의 역사는 고조선에서 시작해서 부여, 고구려, 발해, 그리고 신라의 후예와 발해 유민이 세운 금나라의 역사가 되는 것으로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20/08/11 - [역사/중국] - 요하문명(遼河文明), 그리고 우리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古朝鮮)
그리고 지난 포스팅과 이번 포스팅을 읽으시는 분들은 만주의 역사가 우리 민족의 역사다, 신라인의 후예가 금나라를 건국했다는 민족주의적인 관점, 민족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내용이 아니라, 중국의 역사관이 이렇게도 논파될 수 있고, 해석하기에 따라 동북공정은 얼마든지 허황된 내용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본 포스팅의 많은 부분은 2009년 9월 5일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제 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는 신라의 후예였다'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금나라의 건국과 금태조 아골타
1100년대 송나라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주황색이 북송, 분홍색이 요나라인데, 보다시피 만주 지역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여진족 역시 거란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금나라 건국 이전에는 여진족을 아래와 같이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 두 부류로 분류합니다.
- 숙여진 : 거란에 복종하고 직접 지배를 받던 여진족
- 생여진 : 거란에 조공을 바치는 등 간접적인 지배를 받기는 하였으나, 자신들의 지역에서 독자적인 영향을 발휘한 여진족, 중국 하얼빈 인근의 쑹화강(송화강) 동쪽이 주 근거지
당시 여진족은 아무래도 통합되지 않은 역사가 길어 다소 미개한 취급을 당하며 무시받는 경향도 적잖아 있었지만,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1만 명이 뭉치면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투력에서는 잠재력을 가진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라는 철저하게 여진족이 세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경계하였는데, 생여진 중 하나인 중국 하얼빈 인근 송화강 유역의 완안부 여진족은 그 와중에도 서서히 세력을 결집해 나갑니다. 그리고, 어느 날 만주의 질서가 한순간에 뒤집어지는 전투가 벌어집니다. 바로 1114년의 출하점(出河店) 전투(팔리성 전투)입니다.
이 출하점 전투는 요나라의 천조제가 이끄는 10만 군대가 3700명의 완안부 여진족의 군대에게 말 그대로 대파된, 중국사에 손꼽히는 대전 중 하나입니다. (3700명으로 10만을 박살냄...) 이 전투를 계기로 다른 여진 부족들이 부하가 되기를 자처하면서 일순간 여진족의 세력이 크게 불어나기 시작하였는데요, 이 출하점 전투의 주역이 바로 완안부 여진족의 추장, 아골타(阿骨打)였습니다. 그리고 1115년, 아골타는 금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됩니다. 그리고, 1125년 송과 함께 결국 요나라를 멸망시킵니다.
정강의 변과 완안 올출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킨 금은 한족의 북방 저지선인 만리장성을 넘어 송의 수도 카이펑(한국명 개봉, 開封)으로 거침없이 진격합니다. 당시 금의 황제는 금태종(아골타의 동생, 오걸매)입니다. 그리고, 1127년, 결국 송나라의 심장인 수도 카이펑이 함락됩니다.
※ 참고로 여진족에게 함락당한 당시 카이펑의 인구가 50만 정도로 굉장히 융성한 도시였는데, 이게 어느 정도였냐 하면 당시 유럽 최대 도시 베니스의 인구가 5만 정도 될까 말까이고, 1300년대 런던 인구가 5만 정도입니다.
그리고, 참담하게도(한족의 입장에서) 송의 휘종과 흠종 부자는 여진족의 포로가 되어 만주로 연행됩니다. 이를 정강의 변(정강지변, 靖康之變)이라고 하는데, 정강은 당시 북송의 연호입니다. 이 일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인데,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한족이 중원을 이민족에게 내어준 데다 심지어 황제가 이민족에게 포로로 끌려가는 엄청나게 모멸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이 정강의 변은 중국에서는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로 많이 사용되는데, 완안 아골타의 4남인 완안 올출(兀朮)이 주요 주인공으로 등장을 합니다. 왜냐하면 금과 북송의 전투에서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며 활약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 완안 올출을 진우주, 즉 우리말로 김올출로 부릅니다. 왜 완안 올출을 김우주라고 부를까요. 금나라 왕자의 성이 왜 김씨일까요?
완안 올출의 성은 김씨
중국 서부 감숙성 경안현에는 완안 성씨의 여진족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는 완안 마을이 있습니다. 약 5,000여 명의 완안 성씨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이곳에서 살고 있는데, 여기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직계 조상이 김올출이라고 합니다. 왜 금 황실의 후손들이 만주가 아닌 중국 서부의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요.
이 마을의 사람들은 김올출의 후손인데, 1140년대에 완안 올출, 김올출의 아들이 금황실 내부 정쟁에 휘말려 살해되자 이 중국 서부의 외진 곳으로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1149년에 해릉왕이 금 희종을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하였는데 김올출이 희종의 편에 섰었기 때문에 김올출의 아들이 살해당하는 등 그 후손들이 위험에 빠짐.)
그리고, 이 김올출의 후손들은 역대 금황실의 황제와 형제들을 그린 선인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후손들을 인터뷰해보면 완안 올출을 아주 그냥 자연스럽게 김올출이라 부릅니다. 후손들도 그냥 김올출이라 불러왔을 뿐,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왜 자신들 선조의 성을 완안씨로 부르지 않고 김씨로 부르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게다가 완안씨 사당에 있는 완안 올출의 비에도 버젓이 김올출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자, 중국 금나라의 왕자가 김씨 성이라니, 상당히 흥미습니다. 참고로 김씨 성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흔한 성씨이고, 중국에서는 흔하지 않은 성씨입니다.
아골타의 선조는 우리 민족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만주 지역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668년,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30여 년 후인 698년,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이 고구려의 땅에 발해를 건국하였습니다. 그리고, 926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켰고, 여진족에서 아골타라는 영웅이 등장하면서 1115년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건국하였습니다. 그리고 금나라는 한족의 나라인 송을 침략해 중원을 장악하였고요. 자 이쯤에서 나올법한 질문이 있습니다. 이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의 선조들이 누구일까요?
강화도의 마니산에 민족운동가였던 이유립 선생이 설립해 24명의 우리나라 위인을 모시고 있는 개천각이 있습니다. 환웅천제, 치우천왕, 단군왕검, 고주몽, 대조영 등을 모시고 봄, 가을 두 번 제사를 지내는데요, 이 24명의 위인 중에 금태조 아골타가 있습니다. 여진족인 아골타가 왜 우리나라 위인들과 함께 모셔져 있을까요. 황당하긴 하나 근거가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구한말 역사학자이자 민족학자였던 박은식 선생은 금태조 아골타를 꿈에서 만났다는 몽배금태조라는 글을 남겼는데요, 이 글에 아골타가 우리나라 평주 사람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것도 참 황당하긴 한데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왜 이런 주장을 하였는지 궁금합니다.
중국 하얼빈 근교의 아청시는 금나라의 수도인 상경회령부가 있던 곳인데, 여기에 여진족의 후손들인 만주족의 집단 거주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여진족의 전통 가옥을 보면 짚을 섞어 쌓은 흙벽과 가로지른 서까래가 있어 눈에 익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시골집의 구조를 닮았는데, 한편에는 볏짚으로 이은 행랑채와 재래식 화장실이 있고, 텃밭도 있습니다. 이는 한족들의 가옥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구조인데, 집 내부는 우리와 같은 온돌을 이용해 난방을 합니다.
그리고 여기 사는 사람들은 여가 시간에 전통 방식의 겨루기도 즐기는데, 바로 씨름입니다. 이 또한 한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놀이인데, 무언가 옛날 우리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이죠.
말도, 문자도 잃어버리고 이제 만족(또는 만주족)이라고 불리는 여진족의 후예들. 이들의 조상인 금태조 아골타와 우리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중국 정사에 등장하는 금태조 아골타의 선조
중국 베이징에 있는 수도도서관의 고문헌 자료실에는 송막기문(松漠紀聞)이란 책이 있습니다. 송은 금에게 쫓기면서 양자강 건너 항저우로 피신하게 되는데, 남송의 홍호(洪皓)가 1129년 금에 포로로 잡혀간 휘종과 흠종의 반환을 교섭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이 홍호가 10년간 금나라에 머물며 견문록 형식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이 송막기문은 금에 대한 책이긴 하나 여진, 거란, 발해 관련 연구에서는 나름 신뢰성이 있어 비중 있게 취급되는 자료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금나라 황실의 가계도에 대한 내용들도 수록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여진 추장은 신라 사람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女真酋長乃新羅人, 號完顏氏.
여진 추장은 신라 사람이며 완안씨이다.
- 송막기문 -
송막기문에 나오는 내용을 다 믿을 수는 없겠지만 저자인 홍호가 특별히 금나라 시조를 신라인이라고 조작할 필요성이 없다는 점에서 명백하게 당시 금나라에 그 시조가 신라인 출신이라는 전승이 전해왔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뿐만이 아닙니다.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에는 자신들의 황실 뿌리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두었는데, 형 아고내는 고려에 남고, 둘 째인 금의 시조와 동생 보할리는 여진으로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금시조의 8대손이 태조 아골타입니다. 고려에서 온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입니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兄阿古迺好佛留高麗不肯從
금나라 시조인 함보가 고려에서 처음 (완안부로) 왔을때 나이가 이미 60여세에 달했다. 그 형 아고내는 불교를 좋아해서 고려에 머물고 (함보를) 따르지 않았다.
-금사 본기 제1세기 시조 -
이 사서를 보면 금나라 시조인 함보가 고려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에서 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 명백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금사에는 이 외에도 두 번이나 시조가 고려에서 왔다는 내용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금사는 몽골제국인 원나라에서 금의 멸망 후에 편찬한 것인데, 사실이 아닌 내용을 기록해서 다른 나라의 정통성을 확립해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사실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이로써 두 사서 모두 금의 시조가 한반도에서 넘어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태조 아골타가 1068년생이므로, 8대조 함보로 거슬러 올라가면 대략 900년대 초반이 되겠지요. 900년대 초반이면 신라 말, 고려초의 격동하는 시기였는데, (고려 건국이 918년) 이 시기에 한 무리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흠정 만주 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는 1600년대 초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의 공식 역사서로 만주인의 원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금의 국호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금은 신라 김씨에서 유래하였고, 금이라는 국호는 이를 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사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인 중국 쪽 사서에서의 기록에 근거해서 당사자들이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찌 보면 거짓말 같은 이 이야기가 위의 사서들 뿐만 아니라, 금지, 삼조북, 맹회록 등에도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처가 다른 기록들에서 반복적으로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교차검증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일 확률도 높습니다.
북만주에서 바람처럼 일어나 이민족으로서는 최초로 중국 대륙을 제패하고 한족 황제를 포로로 잡았던 여진족, 그리고 그들의 영웅, 금태조 아골타, 그의 8대조는 고려 초에 한반도에서 넘어간 김함보였고, 그들의 성씨는 김씨였습니다. 엄청나게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의문의 사나이, 김함보에 대해서 작성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포스팅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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