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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우리나라

조선 시대의 과거시험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by Interesting Story 2020.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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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치솟는 실업률과 함께 취업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공시생(공무원 시험 준비생)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 공무원 시험이라는 것이 높은 경쟁률을 보이고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데,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라는 말이 있듯이 시험을 통해서 가능한 우수한 인력을 공무원으로 채용하는 것이 국가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일이겠습니다.

 

비단 요즘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인재를 등용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겠지요. 당연하게도 능력 있는 관료들을 채용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운영 측면에서 핵심적인 부분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잘 알다시피 이를 위한 과거(科擧) 제도가 있었습니다.

- 북새선은도, 현종 5년 함경도에서 실시된 문무과 시험 장면,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웹페이지 -

 

수나라, 최초의 과거 시험을 도입

수 문제(隋文帝) 7년(587년), 처음으로 관리를 뽑기 위한 과거 시험이 시행되었습니다. 황건적의 난 이후로 400여 년간 분열되어 있었던 중국을 재통일한 수 문제는 각 지역별로 여전히 권력을 가지고 있던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관리를 선발하기 위한 선거제를 시행하였습니다. 이 선거제가 과거제도의 전신입니다.

 

참고로 그 이전에는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라고 해서 각 지방마다 중정이라는 관리가 군내 관리들을 1품에서 9품까지 향품이라고 해서 분류하고 중앙정부에 천거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중정에게 인사 청탁이 있었을 테고, 폐단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리고, 이 과거 제도는 당나라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후에 고려와 베트남에서도 도입하여 시행하게 됩니다. 중세 유럽과 일본은 과거제도와 같은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혈연으로 인한 세습과 왕실의 인맥, 그리고 무력으로 통치자들이 군림하는 봉건제 사회가 근세까지 이어졌던 것에 반해 중국과 우리나라는 누군가의 자손이라는 이유만으로 통치 계급이 되는 풍토가 사라지고, 나름 굉장히 합리적이고 공정한 방식으로 관료를 임명하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통일신라 원성왕,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시행

신라에는 익히 알려진 것과 같이 골품제가 있었고, 이러한 골품제에 따라 나뉜 신분을 기초로 관리를 임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원성왕은 성골과 진골을 견제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과 함께 신분적 한계로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6두품을 등용하기 위해 원성왕 4년(788년)에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였습니다. 이 독서삼품과는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라고도 하는데, 유교 경전으로 시험을 쳐서 성적을 삼품(상품, 중품, 하품)으로 구분한 다음 임용 시 그 성적을 고려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이전에 골품제를 토대로 관리가 임명된 것에서 벗어나 학문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 관리가 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입니다. 결국 진골 귀족의 반발과 사회에 뿌리내려있는 골품제로 인해 큰 실효는 거두지 못했지만, 한반도 최초의 관리 선발제도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고려 광종, 과거 제도 시행

고려 역시 마찬가지로 후백제를 무너트리고 신라를 흡수하면서 여러 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기에 불안정한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종 9년(958년) 과거 시험을 시행합니다. 호족들은 그 출신성분으로 직위를 세습하였는데, 독서삼품과 이후 170년 만에 재등장한 관리 선발시험에 당연히 많은 반발이 있었겠죠. 하지만, 광종은 반대세력을 숙청해가면서 기어이 과거제도를 정착시킵니다. (참고로, 유명한 노비안검법을 시행한 사람도 광종입니다.)

 

물론 신라와 마찬가지로 고려 역시 이미 결정된 신분에 따라 귀족들이 관직을 독점하고 세습하는 사회였으므로 음서제 역시 있었고, 양인이 거의 합격하지 못하는 등 과거제도가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지는 못하지만 인재를 등용하는데 어느 정도의 공정성이 확보되는 진일보를 이루었습니다. 이후 1894년 조선의 갑오개혁 때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900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실시되었는데, 이때 과거 제도가 도입됨으로써 관료제 국가를 확립하기 시작하는 중요한 분수령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음서제도 : 5품 이상 고급 관료의 자손들은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고 관리로 채용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광종은 과거제도를 도입한 영향으로 고려사에서 아래와 같은 평가를 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광종(光宗) 이후로는 문교(文敎)를 더욱 정비하여 안으로는 국학(國學)을 숭상하고 지방에는 향교(鄕校)를 설치하여 동리마다 학교[庠序]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리니 이른바 문물이 중화와 같다는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니었습니다.

고려사, 권110, 열전 권제23, 제신(諸臣), 이제현, 충선왕이 이제현을 만권당으로 불러들이다
출처: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jsessionid=C9C379A7980DB684E9A0913F8F1063D2?levelId=kr_110r_0010_0060_0020

-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는 광종의 능, 헌릉(憲陵) 전경, 고려의 기반을 다진 광종의 능이 북한에 있어서 잘 보존되고 있을지.. 출처: www.museum.go.kr -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조선시대에 와서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무려 418회의 문과를 실행했고, 총 15,151명의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였습니다. 과거제도라는 것이 위의 신라와 고려의 사례를 보듯이 당시의 신분제 사회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제도였고, 사실상 18세기까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확실히 앞서있는 인재 채용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된 왕조로서 500년간 유지한 데에는 반역죄를 지었거나 천민 출신이 아닌 이상 실력을 바탕으로 관료가 되어 지배 계층으로 편입할 수 있는 과거 제도가 사회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도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참고로 중국 왕조의 경우 존속 기간이 청나라 296년, 당나라 289년, 명나라 276년 등으로 300년을 넘긴 나라가 없었습니다.

-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행사, 출처: 연합뉴스 -

물론 폐단도 있었습니다. 요즘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고 하면, 아무래도 부모님의 지원 등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오랜 기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는 장수생들의 사회적인 손실로 다가오듯이, 조선시대에도 유능한 인재들이 과거 시험에 오랜 기간 매달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요즘과 같이 생산성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전래되는 설화에 과거 시험공부에만 매달려 아내는 삯바느질을 하면서 근근이 버티는 와중에 가정의 생계는 뒷전으로 농사를 짓지 않는 선비들의 이야기가 은근히 등장하죠.

 

그런데, 저 시절 양반들은 왜 저렇게 과거 시험에 엄청나게 매달렸을까요. 이는 조선의 신분제를 들여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요, 기본적으로 양반이 되기 위해서는 4대 내에 관에서 인정하는 품계가 있어야 했습니다.

양반의 지위는 법적으로 문무반 관료와 그의 직계 가족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세습되지 않았다. 따라서 양반은 3대 이내에 관직에 오르지 못하면 양인으로 강등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양반의 지위는 세습적 성격이 강했다. 고위 관료의 다수는 조상 중에 관료가 있는 양반 가문 출신이었는데 그 이유는 승진에 있어 파벌의 후원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재지사족의 양반 지위는 관습적으로 세습되었다. 지역 양반의 목록인 향안에는 부계와 모계가 모두 양반인 사람만 등재될 수 있었고 4~5대에 걸쳐 양반이 아닌 조상이 있으면 등재될 수 없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양반 항목

따라서 높은 양반의 자손이라도 출세를 하려면 반드시 과거에 합격해야 했으므로 개인의 능력이 출세를 좌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시대의 양반은 특권적 세습신분이 아니라, 부단히 이동하는 지배계층에 지나지 않았다.
출처: 위키피디아 양인 항목

위에서 보듯이 양반이라는 것이 사실상 중세 유럽 등에서 볼 수 있는 귀족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던 것이죠. 향리나 상민들도 과거에 급제하면 양반이 될 수 있었고 (무려 4대에 걸쳐서) 결국에는 양인 계층에서 이미 양반인 사람들은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 시험에 합격을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길이었던 셈입니다.

조선 시대 과거 시험 종류

보통 조선의 과거 시험이라고 하면 문과를 일컫는데, 소과와 대과로 구분하였고, 양인이면 누구나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소과는 또 진사시와 생원시로 구분되었고요, 합격하면 각각 진사와 생원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진사시와 생원시는 각각 초시와 복시로 구성되어 있는데, 1차 시험 격인 초시에서는 한성에서 200명, 지방에서 500명을 뽑았고 (이때 500명을 지역별로 안배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합격자는 총 1,400명인 것인데, 2차 시험인 복시에서 진사와 생원을 이 중에 각 100명을 뽑아서 소과 합격자는 총 200명입니다. 겨우 200명이요. 이렇듯 소과라는 것이 겨우 200명을 뽑는 시험인데, 양반들은 신분을 유지하려면 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매달릴 수밖에 없었겠죠. 요즘으로 치면 전국 단위로 치는 공무원 시험에서 200등 안에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극에 김진사니 생원이니 나오면 무시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최진사댁 셋째 딸이 그렇게 이뻤다는데, 집안 배경도 좋았던 셈. 그러고 보니 메밀꽃 필 무렵에도 허생원이 등장하였네요.)

 

자, 이제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성균관에 입학하는 것도 어찌 보면 대과를 보기 위한 과정이었죠. (대과의 초시 중 관시에서 50명 선발) 대과는 기본적으로 식년시(式年試)라고 해서 3년에 한 번 치르는 정기 시험이 있었고, 그 외에 비정기적인 별시, 증광시, 외방별시 등이 있었습니다. 1차 시험 격인 초시에서 240명을 뽑습니다. 이 중 관시, 한성시, 향시가 있었는데, 향시에서 뽑는 150명은 진사시와 생원시처럼 지역별로 안배하였습니다. 그리고 2차 시험 격인 복시에서 33명을 선발합니다. 겨우 33명입니다. 그리고 임금이 시험 문제를 내고 임금의 앞에서 시험을 보는 전시에서 33명의 등수를 매깁니다. 순위결정전인 셈인데, 여기서 1등인 장원을 하면 종6품, 2등과 3등은 각각 방안과 탐화라고 하였는데 정7품을 받았습니다. 4위에서 10위는 정8품, 11위에서 33위는 정9품을 받았고요. 그런데, 1위에서 3위인 장원과 방안, 탐화는 관직도 함께 받았는데, 4위부터는 품계만 받았습니다. 엄청난 차이죠. 하여튼 이 시대에 관료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엄청난 공부 머리를 가진 사람들만 합격하였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 조선 시대 과거 시험, 소과와 대과, 출처: 동아일보 -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이이(李珥)

신사임당의 아들, 율곡 이이와 관련하여 과거와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바로 구도장원공입니다. 말 그대로 과거 시험에서 장원만 9번을 했다는 뜻입니다.

- 5천원권 지폐의 인물인 율곡 이이, 어머니인 신사임당도 5만원권 인물이 되면서 모자가 지폐 인물이 되는 기염을 토한다. 이미지 출처: 기업은행 블로그 -

소과인 생원시와 진사시 초시와 복시를 모두 장원으로 합격, 대과의 초시, 복시, 전시를 모두 장원으로 합격, 거기다가 비정기 특별시험 격인 별시에서도 장원을 한 이력이 있어 총 9번의 장원을 한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3세(1548년) : 진사과 초시 (향시)

21세(1556년) : 진사과 초시 (한성시)

23세(1558년) : 별시

29세(1564년) : 대과 초시, 복시, 전시, 생원과 초시, 복시, 진사과 초시 (이때 진사과 복시도 치렀으나 장원은 못했음.)

 

뭐.. 13세에 진사시 초시에서 장원으로 시작하여 29세에 대과까지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니 알려진 대로 천재는 천재였던 것 같습니다. 항간에 들리는 이야기로는 당시에 글을 읽을 때 한 번에 열 줄씩 읽었다고 해서 요즘의 속독법과 비슷한 능력을 지녔던 것 같은데, 당시에 책들이 모두 한자로 쓰여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사상이 뛰어났던 이면에 엄청난 두뇌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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