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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우리나라

당태종 이세민을 우주방어한 안시성 전투, 그리고 안시성주

by Interesting Story 2020.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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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개봉한 안시성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안시성주인 양만춘 역에 조인성이 나오는데, 전투신을 중심으로 규모 있게 연출하여 기대했던 것보다 재미있게 관람하였던 영화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 안시성 (2017), 김광식 감독, 출처: 네이버 영화 -

이 영화에서 안시성주인 양만춘은 무력은 물론이거니와 치밀한 전략과 리더십, 훌륭한 인품까지 겸비한 명장으로 묘사되는데요, 하지만 실제로는 안시성주는 양만춘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안시성주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겠네요.

 

안시성 전투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 후기인 645년(보장왕), 중국사 최고의 군주 중 한 명인 당태종 이세민이 이끄는 군대가 고구려의 안시성에서 2개월에 걸쳐 공성전을 펼친 전투입니다. 당시 당태종은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로부터 시선을 돌리고자 하는 정치적인 이유와 동북부 지역의 지배력 강화 목적으로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하지만, 전투는 고구려군의 승리로 끝이 났는데, 당대 최고의 군대였던 당나라는 고구려의 여러 성을 함락시켰지만, 안시성 공략에는 실패하면서 결국 고구려에서 퇴각을 하였습니다.

- 이종상 작가의 1975년작 안시성싸움, 독립기념관 소장, 출처: 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B%B0%95%EC%B0%BD%EB%8F%88-%EC%95%88%EC%8B%9C%EC%84%B1%EC%8B%B8%EC%9B%80 -

이때 여러 차례의 공성에도 쉽게 공략되지 않고 견고하게 수비가 이루어지자 안시성이 우주방어를 뚫기 위해 두 달에 걸쳐 토산을 쌓았는데, 이 토산 역시 고구려군에게 점령당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게다가 당시 중원을 평정한 명군 당태종을 상대로 거둔 승리였기 때문에 중국과 우리나라 양쪽에서 회자되는 전투이며, 당태종이 이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한쪽 눈을 잃었다거나 퇴각하면서 병이 생겨 죽음에 이르렀다는 야사까지 남아 있습니다.

 

- 당군은 안시성의 공략이 쉽지 않자, 토산을 쌓는다. 일러스트 출처: https://gramho.com/media/2195498870025023850 -

 

안시성주, 안타깝게도 실전(失傳)된 이름

안타깝게도 고구려-당나라 전쟁에서 중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안시성 전투를 이끈 안시성주의 이름을 현재 알 길이 없습니다. 아쉽게도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책부원귀(册府元龜) 등 당시의 역사서에 안시성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안시성주라고 표현할 뿐, 성주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요.

- 삼국사기, 안시성주라고 표현하고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출처: 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g_021_0020_0220 -

김부식 역시 안시성주를 호걸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름을 알 길이 없어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덧붙입니다.

논하여 말한다. 태종은 총명하고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기 드문 임금이다. 난을 평정함은 탕왕(湯王) 무왕(武王)에 비할 만하고, 다스리는 것은 성왕(成王)·강왕(康王)에 가깝다. 병력을 운용함에 이르러서는 기묘한 계책을 냄이 끝이 없고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동방을 정벌하는 일에서는 안시에서 패하였으니 그 성주는 가히 호걸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에 그 성명이 전하지 않으니양자(楊子)가 말하기를 “제(齊)와 노(魯)의 대신이 역사에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매우 애석하다고 할 것이다.

- 삼국시가, 안시성주이 이름이 전해지지 않음을 안타까워한다. 출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g_021r_0020_0240 -

 

어떻게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으로 알려지게 되었는가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전해진 계기를 살펴보면, 16세기 명나라의 소설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 약칭으로 당서연의)에 고구려의 장수들이 등장하는데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등장합니다. 다만, 아무래도 출처가 소설이다 보니 근거가 미약합니다. 실학자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하맹춘(何孟春)의 여동서록(餘冬序錄)을 근거로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하나, 여동서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고 하죠.

 

조선 중기에 윤근수(尹根壽)월정만필(月汀漫筆)에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윤근수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를 통해 들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근거가 빈약하죠. 여러 기록들에 이름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명나라 장수가 당서연의를 통해서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에 윤근수의 월정만필을 따라 양만춘으로 표기한 송준길(宋浚吉)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조선 시대의 기록들은 모두 안시성 전투가 벌어지고 10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이후의 기록인 데다가 그 근거가 윤근수의 기록을 전승한 것이기 때문에 불명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김창흡(金昌翕)의 삼연집(三淵集)을 보면, 양만춘의 성씨 역시 楊인지 梁인지도 불분명한데, 이수건 전 영남대 교수가 쓴 '한국의 성씨와 족보'에 따르면, 고구려 시대의 성씨로 양씨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볼 때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매우 빈약하고, 객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성씨와 족보,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우리나라 해군의 국산 3호 구축함의 이름이 무려 양만춘함(DDH-973)입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중국의 소설에 등장하는 불분명한 이름을 우리 해군이 구축함에 사용하였네요. 우리 역사인데 무언가 가공의 이름이 사용된 것 같아 조금 아쉬운 부분입니다.

- 양만춘함, 출처: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159&pn=6&num=41249 -


당태종은 중국의 역사에서 명군 중의 한 명입니다. 그리고, 그 당태종조차 함락시키지 못한 안시성은 고구려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었고요. 아래의 기록들을 덧붙이면서 금번 포스팅을 마칩니다.

 

1. 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에, 류성룡이 선조에게 말하는 부분입니다.

"용인(用人)의 도가 미진해서 그렇습니다. 수(隋)·당(唐)의 무렵에 천하의 군대를 평안도 하나로써 대적할 때도 오히려 안시 성주(安市城主)의 기재(奇才)와 을지문덕(乙支文德)같은 사람이 있어 중국의 역사에서도 찬미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 어찌 적임자가 없겠습니까. 다만 용인의 도를 극진히 하지 못해서일 뿐입니다."

 

- 선조28년, 류성룡이 안시성주와 을지문덕을 언급합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806001_002 -

 

2. 원나라 초대 황제인 쿠빌라이 칸이 고려의 항복을 받으면서 당태종도 복속시키지 못한 나라라고 합니다.

(고려사절요 권18 > 원종순효대왕(元宗順孝大王) > 원종(元宗) 1년 > 3월 > 태자가 몽고 사신 속리대와 함께 개경에 도착하다)

그때 황제의 아우 홀필열(忽必烈, 쿠빌라이)이 강남(江南)에서 군대의 위세를 보이다가 군사를 돌려 북상하였다. 태자가 폐물을 받들어 길가에서 배알하니, 황제의 아우가 놀라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고려(高麗)는 만리(萬里)의 나라이다. 당(唐) 태종(太宗)이 몸소 정벌했으나 복속시킬 수 없었는데, 지금 세자가 스스로 오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 여몽전쟁 말기, 쿠빌라이 칸이 당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스스로 항복하였다면서 기뻐한다. 출처: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j&bookId=%EA%B6%8C18&types=r#detail/kj_018r_0010_0020_0030_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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