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유럽

베르트랑 뒤 게클랭, 중세 유럽의 토너먼트 일기토

by Interesting Story 2020. 7. 26.
반응형

토너먼트(tourmanenet)와 주스트(Joust, Joute), 그리고 일기토(一騎討)

토너먼트(tourmanenet)라는 말은 중세시대 기사들의 결투 방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스포츠 경기 등에서 일대일의 대결을 거듭하면서 패자는 탈락하고 승자는 다른 승자와 대결하여 나가면서 최종적으로 최후의 두 사람 또는 두 팀이 우승을 결정하게 하는 시합 방식을 말합니다. 주스트(Joust, Joute)는 중세 유럽에서 기사들이 서로를 향해 기병용 창을 겨누고 돌격하는 방식으로 기량을 겨루는 마상 창 시합입니다. 주로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주스트는 흡사 삼국지연의의 일기토(一騎討)가 떠오릅니다. 일기토는 불필요한 승부를 피하기 위해 각 진영의 장수끼리 일대일의 기마전으로 치르는 결투를 보통 일컫죠.

중세 유럽 일기토
- 주스트, 마치 삼국지연의의 일기토를 보는 듯 하다. 출처: https://www.onefam.com

백년전쟁시대, 이 토너먼트와 일기토로 몰락한 가문의 출신에서 프랑스 총사령관이 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브르타뉴의 독수리(The Eagle of Brittany, L'Aigle de Bretagne), 브로콜리 네이드의 검은 개(The Black Dog of Brocéliande), 베르트랑 뒤 게클랭(Bertrand du Guesclin, 1320-1380)입니다.

베르트랑 뒤 게클랭 동상
-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동상, 출처: http://lepeuplebreton.bzh/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토너먼트 데뷔 이야기

베르트랑은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한 몰락한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말 그대로 몰락한 귀족의 가문이라 가난하기 그지없었다고 하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하고, 편을 갈라 패싸움도 잘하는 아이였다는군요.

 

베르트랑이 17세가 되던 해 (1337년), 랭스에서 어느 공작의 결혼을 축하하는 기사 토너먼트가 열리게 되는데, 찢어지게 가난하였지만 그래도 명색이 귀족이고 기사 계급이었던 터라 아버지, 로베르 뒤 게클랭은 이 마상창 시합에 참가하기 위해 랭스로 향하게 됩니다.

 

베르트랑 역시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아버지를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는데, 여기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이 일어납니다. 로베르는 워낙에 가난했던 터라 말과 갑옷을 마련하지 못해, 짐꾼의 말을 빌리고 갑옷으로 다 떨어져 가는 옷과 철 쪼가리를 걸쳤습니다만, 아버지와 달리 눈부시게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을 보고 베르트랑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심지어, 남루한 차림의 아버지는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샀기 때문에 그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요. 베르트랑은 분노를 참지 못했고, 토너먼트에서 패배한 사촌이 밖으로 나오자 그 기사에게 사정하여 말과 투구를 빌립니다. 그렇게 정체를 감춘 채로 토너먼트에 등록한 다음, 무려 15명을 토너먼트에서 이기고 올라와 아버지와의 대결에서 승부를 거부하고, 일부러 패배하여 아버지의 체면을 살려줍니다. 그리고 다음 경기에서 그의 투구가 벗겨지면서 얼굴이 드러납니다. 17세 소년,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이렇게 첫 토너먼트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베르트랑은 아버지와의 대결을 일부러 패배한다. 출처: https://www.akg-images.com/archive/Du-Guesclin-abaissa-sa-lance-devant-son-pere-(%E2%80%A6)-2UMDHUREP8YG.html -
- 1337년 베트트랑은 15명의 기사를 물리치고, 대결 중 헬멧이 벗겨지고 정체가 드러난다. 출처: https://www.alamy.com/in-1337-17-year-old-bertrand-du-guesclin-attended-a-medieval-tournament-that-was-taking-place-in-rennes-mocked-by-young-knights-because-of-his-appearance-and-not-being-part-of-the-nobility-he-wasnt-allowed-to-take-part-he-managed-to-find-a-horse-a-helmet-to-cover-his-face-and-disguise-his-identity-legend-has-it-that-he-won-every-jousting-competition-that-he-was-challenged-to-that-day-defeating-no-less-than-15-well-trained-and-armed-knights-everybody-wanted-to-know-who-this-brilliant-knight-was-finally-someone-lifted-the-visor-of-his-helmet-to-reveal-his-identity-image180485180.html-

 

기사 작위를 수여받다.

영웅은 난세에 태어나는 법이라고 했던가요, 1337년 백년전쟁이 발발합니다. 이때 프랑스는 인구가 1500만에 달하는 강대국이었는데, 그럼에도 잉글랜드 군대에게 여러 도시들을 내주며 국토가 잿더미가 되어갑니다. 전쟁에서 그렇게 유린당하던 이유 중에 하나를 꼽자면 프랑스의 기사도 문화를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데, 대규모로 정면 승부를 하는 것이 프랑스의 전투 방식이었던 반면, 방화와 약탈을 하고 빠졌다가 기습하기를 반복하는 잉글랜드군이 훨씬 효율적이었습니다. 잉글랜드는 이미 내란으로 분열하면서 실전 경험을 통한 전술이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1341년 4월, 브르타뉴에서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합니다. 브르타뉴 지역은 당시 공작령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에도, 잉글랜드에도 속하지 않았는데, 베르트랑도 의용병을 모아 이 전쟁에 참전합니다. 그리고, 몽모랑 성에서 휴 칼블리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기사 작위를 수여받습니다. 1354년, 몰락한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기사 작위를 받는 순간입니다.

 

랭스(Rennes) 공성전에서의 일기토

베르트랑은 1356년에서 1357년 사이에 벌어진 랭스(Rennes) 공방전에도 참전을 하여 성공적으로 방어를 해냅니다. 베르트랑은 성을 포위하고 있는 적의 주력군과는 붙지 않고, 소규모로 흩어지는 등의 취약한 부분이 발생하면 매복하였다가 기습하여 피해를 주고는 빠르게 후퇴를 반복하였는데, 당시 프랑스군의 전투 방식이 아니었던지라 잉글랜드 군은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베르트랑의 생소한 기동전에 연이어 농락당하던 잉글랜드군의 기사 윌리엄 밤브로우(William Bamborough)가 베르트랑에게 일기토를 신청하게 됩니다. 그리고, 베르트랑은 윌리엄의 머리를 두쪽으로 갈라버립니다. 이 일로 잉글랜드군은 사기가 떨어져 결국 후퇴하였습니다.

 

디낭(Dinan) 방어와 일기토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에게 대패를 합니다. 그리고 국왕 장 2세가 스스로 잉글랜드로 건너가 포로가 되고, 샤를의 섭정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디낭 역시 잉글랜드의 랭커스터 공작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르트랑은 병사들을 이끌고 합류하여 디낭의 사령관으로 공성전을 지휘하고, 45일간의 휴전을 협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베트트랑의 동생인 올리비에가 디낭 밖으로 나갔다가 사로잡히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베르트랑은 동생을 되찾기 위해 일기토를 신청하였고, 잉글랜드군은 제안을 받아들여 20명의 기사가 증인으로 참석하는 무대를 마련합니다.

 

이때 잉글랜드에서는 켄터베리의 토마스경(Thomas of Canterbury)이 상대로 나오게 되었고,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습니다. 결국 두 사람의 창은 부러지고, 다시 검을 꺼내들어 결투를 이어가던 와중에 토마스의 검을 베르트랑이 튕겨내고, 베르트랑이 말에서 내려 검을 치워버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의례 상으로는 토마스가 대결을 포기하는 것이 수순이었으나 하마한 베르트랑에게 토마스는 말을 몰아 깔아뭉개기 위해 돌진하였습니다. 이 때 베르트랑은 기민하게 공격을 피한 다음, 말을 찌르고, 토마스의 머리를 발로 내려찍어 승리합니다. 그리고, 올리비에는 약속대로 풀려납니다. 그리고 디낭 역시 성공적으로 잉글랜드군의 공세를 이겨내고 방어하게 되었습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 대패한 프랑스군에게는 뜻깊은 일이었고, 베르트랑의 명성은 전역으로 퍼지게 됩니다.

 

- 토마스경의 말에 칼을 찔러넣은 베르트랑, 출처: https://www.lookandlearn.com/history-images/M094435/The-Duel-between-Sir-Bertrand-du-Guesclin-and-Sir-Thomas-of-Canterbury?t=4&n=925250 -
- 토마스의 말에 칼을 찔러넣는 베르트랑, 출처: https://www.akg-images.com/archive/Duel-de-du-Guesclin-et-de-Thomas-de-Cantorbery-2UMDHURE7XYG.html -

코크렐 전투 (Battle of Cocherel) - 정규군 사령관으로 임명되다.

베르트랑은 당시 소규모의 게릴라전과 일기토 능력만 증명되었을 뿐, 아직 대규모 정규전에서 검증되지 않았던 터인데, 샤를 5세(Charles le Sage, 현명왕 샤를)는 베르트랑의 전술을 이해하였고,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인 베르트랑을 파격적으로 정규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이윽고, 1364년, 노르망디의 코크렐 지역에서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이 격돌합니다. 당시 잉글랜드군은 언덕에 진을 치고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었는데요, 사령관은 가터 기사단의 인원이었던 명장 장 드 그레일리였습니다.

 

베르트랑은 소규모 기사를 돌진시켜 퇴각하는 듯이 잉글랜드군을 유인한 다음, 추격하는 잉글랜드군을 매복하고 있던 소대들을 이용하여 측면과 후미를 교란하고, 베르트랑의 본대가 잉글랜드군을 공격하면서 퇴로까지 차단하였습니다.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 코크렐 전투에서 베트르랑, 출처: https://www.alamy.com/stock-photo-scene-from-the-life-of-bertrand-du-guesclin-19th-century-artist-unknown-11066882.html -

 

- 잉글랜드군의 장 드 그레일리가 베르트랑에게 항복하는 장면,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Cocherel -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이 되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을 돕기 위해 몇 차례의 전투에 참가하고, 1370년에 귀국, 샤를 5세는 베르트랑에게 명검을 하사하면서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됩니다. 그리고, 샤를 5세와 베르트랑은 차근 차근 잉글랜드군이 점령하였던 지역을 다시 수복하기 시작하였고, 1380년대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영토를 거의 다 회복하게 됩니다. 하지만, 베르트랑은 1380년 어느 성의 잔병을 소탕하는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생을 마감합니다.

- 베르트랑에게 검을 하사하는 현명왕 샤를, 출처: https://fr.wikipedia.org/wiki/Bertrand_du_Guesclin -


몰락한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놀라운 일기토와 파비우스 전술로 프랑스군 총사령관까지 되었던 기사 베르트랑 뒤 게클렝의 이야기는 이렇게 마칩니다. 참고로, 많은 기록이나 그림이 그가 칼을 사용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무기로 큰 도끼를 더 선호하였다고 합니다. (위의 동상 이미지 참조)

 

※ 파비우스 전술 :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의 군대에서 맞서 직접적인 싸움을 피하면서 지연작전과 게릴라전을 펼친 로마의 장군, 파비우스의 전술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