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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럽

정치와 종교를 발 밑에 둔 거대 자본가, 야코프 푸거(Jakob Fugger)

by Interesting Story 2020.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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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 중의 한 명, 거기다가 역사적인 영향을 따지면 단연 야코프 푸거(Jakob Fugger)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그가 쌓아 올린 부가 어느 정도였느냐하면 죽을 때 남긴 재산이 당시 유럽 GDP의 무려 2%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푸거 가문은 어떻게 그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고, 역사 속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 야코프 푸거의 초상화, 15세기 독일 최고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 작품, 케빈 스페이시가 조금 닮은 것 같기도?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Portrait_of_Jakob_Fugger -


은(銀) 광산의 채광권을 통한 부의 축적

정말이지 엄청난 부를 쌓아 올렸던 푸거 가문은 왕족도, 귀족도 아니었습니다. 농민이었던 야코프 푸거의 할아버지, 한스 푸거가 아우크스부르크로 이주해 직조공으로 일을 하다가 직물을 사모으고 팔던 중개상이 되면서 푸거 가문의 기반을 닦습니다. 그리고 직물상을 물려받았던 푸거는 직물 사업에 만족하지 않고 대출 사업을 시작하는데,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이자 대신 채권 방식의 권리를 받았습니다. 사실 당시는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이자를 받는 고리대금업이 금지되어 있었죠. 자, 그러면 이자를 받지 못하므로, 대출의 조건으로 받는 권리가 큰 수익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시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푸거는 이때 은(銀)에 주목합니다.

 

신대륙의 발견 전까지 유럽 최대 은광도시는 슈바츠(Schwaz)였습니다. 이곳은 티롤의 백작인 지기스문트 대공(1427 - 1496)이 통치하였는데, 지기스문트 대공은 사치스러운 생활로 많은 빚이 있었고, 1487년 베네치아와 벌인 전쟁(로베르토 전쟁) 때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푸거는 이 상황을 놓치지 않고 가문의 전체 재산과 본인의 인맥을 이용하여 최대한의 돈을 끌어모아 지기스문트 대공에게 배상금을 대출해 주는 모험을 합니다. 이때 계약의 조건은 지기스문트 대공이 대출을 상환할 때까지 푸거가 슈바츠에 있는 은 광산의 채굴권을 소유하고 모든 수입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왜 모험이냐 하면, 지기스문트 대공이 나중에 돈을 갚기 싫어서 나 몰라라,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면 영끌해서 모은 재산을 회수하지도 못하고 파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기스문트 대공은 대출에 대한 계약을 잘 지켰고, 티롤 전체의 은 거래가 푸거 가문을 통해 일어나게 되면서 막대한 부를 쌓기 시작합니다.

- 슈바츠의 은 광산에서 일하는 광산 노동자, 출처: https://fuggerstrasse.eu/en/schwaz.html -

 

막시밀리안 1세의 후원자가 되어 구리 시장을 독점

엄청난 부를 쌓은 푸거는 서서히 다른 사업을 물색할 필요를 느끼는데, 은 광산의 채굴에 대한 독점적 권리에 대한 반발도 있었을 뿐더러 사실 지기스문트 대공의 쇠퇴해가는 정치적 권력도 새로운 사업 방향을 고려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때 막시밀리안(훗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을 만나게 되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향후 유럽의 패권을 쥐게 될 것이라 예상하고 막시밀리안을 재정적으로 지원합니다. 그리고, 향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푸거의 재정적 지원을 바탕으로 두 명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등극시키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탄생시킵니다. (이 양반 정경유착의 끝판왕인 듯)

 

사실 합스부르크 가문에는 이전부터 돈을 빌려주고 있었는데, 프리드리히 3세(막시밀리언 1세의 아버지) 역시 푸거 가문에 채무를 지고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평민이었던 푸거 가문은 가문의 문장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요.

- 푸거 가문의 문장, 출처: 위키피디아 -


※ 참고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외모적 특징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포스팅한 바 있습니다.

2020/08/05 - [유럽] - 합스부르크 가문의 외모에 얽힌 이야기와 근교계수(Inbreeding coefficient)

 

합스부르크 가문의 외모에 얽힌 이야기와 근교계수(Inbreeding coefficient)

합스부르크 턱(Habsburg jaw or Habsburg lip) 13세기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하고 오스트리아 왕실을 거의 600년간 지배한 합스부르크 가문(House of Habsburg)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함께 유럽��

interstory.tistory.com


1490년 3월 16일, 지기스문트 대공은 티롤의 주민들로부터 여러 사업상의 문제와 재정의 낭비를 이유로 오스트리아의 모든 영지를 통합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언 1세에게 통치권을 넘길 것을 강요받게 됩니다. 그리고, 막시밀리안이 모든 부채를 지불 보증하는 조건으로 퇴위하게 되는데, 이로써 푸거는 막시밀리안의 가장 중요한 자금책이 되면서 은 광산 사업 역시도 안전하게 보장을 받습니다. 푸거 입장에서는 지기스문트를 배신하고(?) 앞날이 창창한 합스부르크 가문쪽으로 줄을 선 것인데, 이러한 일련의 흐름이 우연이 아니라 무언가 푸거의 사전 정지작업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대목입니다.

- 막시밀리안 1세, 출처: 위키피디아 -

 

자, 여기서 푸거는 어떻게 또 부를 쌓느냐, 어디에 주목하느냐 하면 바로 구리입니다. 하지만 당시 구리 광산에 투자하는 것은 이전의 은 광산 투자보다 리스크가 더 컸는데, 광산 주변에 도로를 내고 여러 인프라를 구축해야 되기 때문에 막대한 투자금이 필요할 뿐더러 그 투자금을 회수하는 데에도 오랜 기간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오스만 투르크가 빈번히 침공하는 헝가리에 주로 규모가 큰 구리광산들이 있다는 심각한 리스크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헝가리인이 아닌 입장에서 헝가리에서 안정적으로 채굴을 하려면 무언가 안전이 보장되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어마어마한 투자를 집행해놓고 안보문제로 자칫 모든 것을 잃을 가능성이 있었죠. 그런데, 푸거의 자금 지원을 받는 막시밀리안이 마치 푸거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헝가리를 침공합니다. 푸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막시밀리안의 영토 내 모든 구리 광산을 인수하기 시작하면서 아르놀트슈타인에 엄청난 규모의 구리 가공 공장을 건설합니다. 그리고, 야금학에 정통하고 침수된 광산 복구에 대한 기술을 가진 투르조 야노시(János Thurzó)와 동업까지 하면서 규모를 갖춘 구리 산업이 마침내 성립됩니다. 사실 투르조 야노시는 오스트리아인이었지만, 조상이 헝가리인이었고, 헝가리 내 인맥들이 많았기에 광산의 소유권을 비교적 수월하게 임차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유럽의 구리 시장을 독점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 왕실과 이중의 동맹 결혼을 맺어 헝가리 내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이 확대되는데, 이 때도 푸거가 재정적인 지원과 함께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물론 헝가리 내에서 본인의 사업 안정을 위해서였겠지요. (합스부르카 왕가와 헝가리 왕가의 결혼 비용을 모두 푸거가 지불하였다고 함.)

 

푸거는 1514년 백작 작위까지 받습니다. 백작이 되면 영지까지 생기죠. 그리고, 유럽의 동을 독점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든 독점을 해야 큰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푸거는 이렇게 르네상스 시대 주화의 주원료인 은과 빈발한 전쟁이 있던 그 시기에 소총과 대포의 주원료인 구리를 틀어쥐면서 엄청난 부를 쌓고 황제와 교황의 배후를 조정하는 실력자가 되었습니다.

 

이자 부과의 합법화

- 고리대금업자와 그의 부인, The Money Changer and His Wife, Quentin Matsys, 출처: 위키피디아 -

위에서도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15세기까지 교회에서는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 주어라(누가복음 6장 35절)’ 같은 성경 구절에 근거해 빌려준 돈에 대해 이자를 부과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지만 이미 교황, 추기경, 황제에게까지 돈을 지원해주고 있던 푸거는 전방위적인 로비를 펼칩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후원한 젊은 신학자들을 동원해 이자 부과의 정당정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는 한 편, 주교와 귀족은 물론 교황 레오 10세에까지 서신을 보내어 마침내 성서의 해석까지 바꾸는 실로 엄청난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1515년, 교황 레오 10세는 이자 부과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칙령에 서명하게 됩니다. 칙령의 내용은 "고리대금은 본성상 불모인 것에서 얻는 이익, 즉 '노동이나 비용, 위험 없이 얻는 이익'만을 일컬을 뿐이다"는 것으로,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해당이 되면 이자를 물리는 것은 합법적이라는 것인데, 사실 대출이라는 것이 노동이나 어떤 비용, 위험이 없는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대금업에 대한 종교적 정당성이 부여되면서 현대 은행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된,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황 레오 10세도 당시 재벌인 메디치 가문 출신이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푸거는 정치권력 및 종교권력과 결탁하면서 엄청난 부를 또 쌓아갑니다. 하여튼 또 떼돈을 법니다.

- 교황 레오 10세, 이자 부과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칙령에 서명한다. -

 

참고로 은과 구리를 가지고, 후추 무역에서도 큰 돈을 법니다. 인도가 후추를 팔면서, 금, 은, 구리를 원했기 때문인데, 16세기 난파선에서 푸거 가문의 동판이 발견된 아래 기사를 참고해 보시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11/2019041100204.html

 

[현미경] 北海 16세기 난파선엔 왜 銅板 5t이 실렸나

지난해 12월 31일 네덜란드 인근 북해를 지나던 파나마 국적 대형 화물선이 폭풍우를 만나 휘청거리면서 배에 실린 컨테이너 일부가 바다에 빠졌다..

news.chosun.com

큰 위기를 정경유착으로 해결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중세 가톨릭에서는 공식적으로 이자 부과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교나 추기경 같은 교회 관계자들이 직접 재산 증식을 위해 투자하기가 어려웠고, 푸거가 비밀리에 돈을 맡아 돈을 불려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푸거가 돈을 맡아주었던 사람 중에 브릭센(Brixen)의 추기경이었던 멜키어(Melchior von Meckau)가 있었습니다. 푸거 역시 구리 광산 산업을 위해 막대한 투자금이 필요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멜키어는 중요한 후원자였죠. 그런데, 1509년 멜키어가 사망하면서 큰 위기가 닥칩니다. 바로 1496년 멜키어가 푸거에게 맡긴 15만 굴덴(현재의 약 1유로)이 1509년 멜키어가 사망하였을 때 큰 금액으로 불어나 있었고, 이 금액을 교황이나 멜키어의 가문에서 즉각적인 회수를 하게 되면 푸거는 파산이 불가피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동안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정경유착이 빛을 발합니다. 푸거는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황제 막시밀리언 1세를 끌어들이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황제는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교황 율리오 2세의 편에 서기로 약속합니다. 그 대신에 죽은 멜키어 추기경의 상속자가 되기로 승인을 받죠. 이렇게 푸거는 갚아야 할 금액을 황제의 부채로 정산해 버립니다. 물론, 황제에게는 베네치아 원정에 필요한 군자금을 대줍니다. 사실 이런 일에 대비해서 유력한 집안이나 황실에 돈을 빌려주고 하는 것이겠죠.

 

면죄부 판매로 종교개혁을 촉발

심지어 면죄부(indulgence) 판매와 종교개혁의 이면에도 푸거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종교개혁을 이야기하면 마틴 루터를 떠올릴 텐데, 사실 푸거 역시 중요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한 편으로는 더 중요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1517년 마인츠 대주교 자리가 매물(?)로 나왔을 때 언더독이었던 알브레히트(Albrecht)는 마인츠 대주교가 되기 위해 자신을 후원하던 푸거로부터 거액을 빌려 교황에게 뇌물로 전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돈의 힘으로 대주교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 정도면 사실 푸거가 알브레히트를 대주교로 만들어 준 거라고 봐야겠죠.

※ 마인츠 대주교는 선제후 중의 한 명으로 교황 바로 아래의 고위직인데, 독일 가톨릭 교회에서는 최고위 성직자.

 

이제 대주교에 오른 알브레히트는 푸거에게 빌린 돈을 갚아야 했기 때문에 면죄부 판매라는 희대의 아이디어를 고안해 냅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기 위한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단박에 동의하고 실행에 옮깁니다. (레오 10세는 사치스러운 교황이기도 했고, 교황청에 많은 빚을 남기기도 합니다.) 대출금 상환은 면죄부 판매 대금을 교황과 푸거가 절반씩 나눠 갖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합의하고요. 면죄부 판매 대금을 로마로 송금하는 유통 업무도 푸거가 담당합니다. 그러나 이걸 어떻게 알게 된 루터가 그 유명한 95개 조 반박문을 쓰면서 종교개혁이 촉발되죠. 마르틴 루터는 푸거에 대해 엄청난 비난을 합니다만, 어떻든 푸거는 이렇게 돈을 계속 벌고, 부를 쌓아 올립니다. 아무튼 그냥 계속 떼돈을 법니다.

- 면죄부 판매, 출처: 위키피디아 -

 

독일 농민전쟁 진압과 푸거라이 건설

16세기 독일 사회는 자본주의가 진행됨에 따라 서서히 자본가와 노동자로 계급이 나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높은 소작료와 세금으로 점차 피폐해져 가고 있던 농민들을 데리고 1524년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가 민중항쟁을 이끌면서 농민전쟁이 발발합니다.  (훗날 엥겔스는 독일 농민전쟁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대결의 전초전이라고 평가하면서 계급투쟁으로 해석함.) 그리고, 여기에도 푸거가 등장합니다. 푸거가 노동자나 농민들의 표적이 된 것이죠. 푸거의 근거지인 아우크스부르크와 영지가 위협받는 전황으로 흘러가자 푸거는 정치적인 인맥을 활용합니다. 귀족들에게 전쟁을 위한 자금을 지원하고 귀족들의 군대는 농민 봉기군을 잔인하게 진압합니다. 독일 농민전쟁에 가담한 소작농이 30만 정도였는데, 10만 명이 학살되면서 진압되었습니다. 냉전 시절 서독과 동독은 각각 우표와 지폐에 푸거와 농민군 리더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 초상화를 넣어 대결했을 만큼 푸거는 공산주의로부터 유럽을 지켜낸 상징적 인물로 통했습니다.

- 1959년 발행된 우표, 출처: https://www.dreamstime.com/th-birthday-jakob-fugger-serie-circa-moscow-russia-september-stamp-printed-german-federal-republic-germany-devoted-to-image135413234 -

하지만, 푸거의 입장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을 없애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견고하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푸거라이(Fuggerei)를 건설합니다. 1516년, 푸거 가문은 아우크스부르크 시내에 부지를 매입하고 연립주택 106채를 건설하여 가난한 임금 노동자가 일 년에 1굴덴(현재의 1유로 정도)의 임차료를 내고 입주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기도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대신 가난하면서 일하지 않으면 입주가 불가능하였고요.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라면 자기가 살 집은 가질 수 있도록 해 준 것입니다. 이 푸거라이는 세계 최초의 사회 공동 주거 시설로 현재까지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 현재 명소가 된 푸거라이, 출처: 위키피디아 -

 

금권선거를 통해 카를 5세를 황제로 만든다.

막시밀리안 1세가 1519년 1월 서거하자, 야코프 푸거는 본격적으로 황제 선거의 로비전에 뛰어듭니다. 이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선출직이었는데, 선제후(選帝侯)들의 투표로 결정되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선제후들이 가진 표의 대가를 누가 후하게 쳐주느냐가 관건인 셈입니다. 그리고, 푸거의 입장에서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5세가 황제로 등극하여야 그동안 투자한 것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죠.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푸거가 대주는 자금을 이용해서 선제후들을 뇌물로 매수합니다. 뭐, 이쯤 되면 실제로 황제를 결정하는 건 푸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 덕분에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지만, 엄청난 빚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 카를 5세, 영토가 광대하여 그가 다스리던 제국을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다. -

 

1521년 카를 5세는 스페인의 구리 광산과 금 광산 등을 양도해서 일정 부분의 빚을 상환해 나갑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뒤 1523년 뉘른베르크(Nürnberg) 제국의회에서 상업자본의 제한과 지점 수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독점의 폐해를 막으려는 시도입니다. 이때 푸거는 황제 카를 5세에게 아래와 같이 서신을 보냅니다.

 

제가 없었다면 황제 폐하께서는 로마 황제의 대관을 쓰지 못하였을 겁니다.

 

뭐, 거의 협박하는 투입니다. 내가 너를 황제가 되게 했는데, 알아서 잘해라, 아니면 돈 갚던지 뭐 이런 뉘앙스죠. 결국 카를 5세의 도움으로 독점 제한에 관련된 논의는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고, 유야무야 됩니다. 엄청난 영향력입니다. 참고로 카를 5세의 공식 타이틀은 아래와 같은데 (81개라고 합니다.) 이런 엄청난 황제마저도 푸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것입니다.

- 카를 5세의 공식 타이틀, 이런 황제에게도 푸거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출처: 나무위키 -


합스부르크 가문과 결탁하여 두 명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만들어낸 야코프 푸거는 1525년 사망하였습니다.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재산은 조카에게 상속되었고요.

 

나중에 결국 펠리페 2세는 1557년부터 스페인의 국가 파산 선고를 하면서 푸거 가문에 대해서 채무불이행을 선언합니다. 이때 막대한 피해를 입은 푸거 가문이 뿌리째 흔들리게 되면서, 결국 합스부르크 왕가와 마찬가지로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희미해져 갔습니다.

 

참고로, 야코프 푸거에 대한 내용은 그레그 스타인메츠의 '자본가의 탄생'에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자본가의 탄생:자본은 어떻게 종교와 정치를 압도했는가,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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