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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럽

카노사의 굴욕, 복수를 위해 여전사가 된 공주 마틸다의 대서사시

by Interesting Story 2020.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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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에서 황제가 무릎을 꿇은 상대는 교황이 아니다.

모두들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카노사의 굴욕에 대해서 배우셨을 겁니다. 카노사의 굴욕은 1077년 1월 28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Heinrich IV)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카노사 성에 가서 용서를 구한 사건입니다. 교황 권력이 황제 권력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전환점이 된 사건이라고 (엄밀히 말하면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중고교 교과서에 실린 아래 그림으로 유명하죠.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사 돈지오(Donzio)가 그린 비타 마틸다스(Vita Mathildis)라는 그림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진을 자세히 보면 하인리히 4세가 무릎을 꿇은 상대는 교황이 아니라 클뤼니 수도원의 위그(Hugh) 수도원장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아니, 카노사의 굴욕은 황제가 교황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구한 사건인데, 그렇다면 저 그림에서 황제가 무릎 꿇은 저 사람은 누구인지 궁금하군요. 놀랍게도 저 인물은 여자입니다.

- 카노사의 굴욕, 하인리히 4세가 어떤 여자에게 무릎을 꿇고 있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B%85%B8%EC%82%AC%EC%9D%98_%EA%B5%B4%EC%9A%95 -

그녀는 '마틸데 디 카노사, 카노사의 마틸다 (Matilde di Canossa, Matilda of Canossa, Matilda of Tuscany)'입니다. 그리고 저 그림은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고 속죄할 수 있도록 중죄를 요청하는 모습이고요. 아래부터는 마틸다라고 표기하도록 하고, 이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 마틸데 디 카노사, 출처: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14/2020071400004.html -

마틸다, 가족을 잃고 복수를 결심한다.

마틸다는 1046년 북부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백작 보니파치오 3세와 상 로렌의 백작 프레데리트 2세의 딸인 베아트리체 사이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참고로 베아트리체는 황제 하인리히 3세의 사촌입니다. 이 토스카나 가문은 타락한 교회를 비판하고 청렴한 개혁파 교황을 지지하였는데, 1052년 보니파치오 3세가 부패한 보수 세력으로부터 암살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사단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되자, 너무 어린 아들을 대신해서 미망인이 된 베아트리체의 섭정이 시작되었는데, 영지를 탐내는 주변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마틸다를 비롯한 아이들을 지키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하 로렌 지방의 공작 고트프리트 3세와 재혼합니다. 그런데 황제 하인리히 3세의 입장에서는 둘의 결합으로 넓은 영토를 가진 큰 세력이 생겨나므로 달갑지 않습니다. 게다가 고트프리트 3세는 이탈리아의 국왕이 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에 반기를 들고 황제의 독일 영토 일부와 북이탈리아 일대를 장악합니다. 자, 이제 황제의 입장에서 명분은 충분합니다. 안 그래도 눈에 가시 같던 반 황제 파였는데, 영주가 황제의 승낙도 없는 결혼을 한 데다가 황제의 영토까지 잠식하였으니 죄를 물어야겠죠. 그리하여 1055년 황제는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는데, 황제의 남하 소식을 접한 고트프리트 3세는 베아트리체와 아이들을 버리고 자신의 영지인 로렌으로 도망갑니다.

- 1045년 신성로마제국의 영토 현황, 출처: http://blog.naver.com/winlee96/220672838888 -

이렇게 되자, 베아트리체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이들을 지키고 영지를 보전하기 위해서 도망쳐 버린 남편 대신 황제에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리고, 죄인의 복장을 하고 황제가 있는 피렌체로 장녀 마틸다를 데리고 찾아갑니다. 백작 부인의 화려한 옷이 아니라 죄인이 입는 남루한 옷을 입은 어머니가 황제에게 엎드려 사죄하는 모습을 본 마틸다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관용을 베풀기는커녕 모녀를 구속하여 독일로 호송하는데, 포로가 되어 이송되는 중에 카노사 성에 남겨 둔 아들과 딸이 급사하였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죠. 베아트리체는 황제의 명령으로 자신의 아이들이 살해되었음을 직감하면서 마틸다만은 살려달라고 굴욕적으로 황제에게 애원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그녀와 열 살 소녀 마틸다만이 가까스로 살아남게 됩니다. 하인리히 3세는 몰랐습니다. 저 열 살 소녀가 나중에 복수를 하게 될 줄은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왜 저렇게 후환을 남길까 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카노사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 지위를 가지게 된 마틸다는 이제 복수를 위한 대서사시를 시작합니다.

 

마틸다, 복수의 여정을 시작하다.

이제 마틸다는 복수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잃어버린 토스카나를 다시 되찾아 영주가 되어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황제에게 당한 치욕을 갚고 죽은 동생들의 복수를 위해 남자들 틈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통치자가 되기 위한 다양한 지식을 습득합니다.

 

그리고, 1077년,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사망하고 당시 6살로 어린 황태자가 하인리히 4세로 즉위합니다. 어린데다가 주변 제후들의 견제가 심하다 보니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는데 도망쳤던 고트프리트 3세가 야망에 불타 어린 황제를 이용합니다. 로렌의 공작으로써 로렌과 토스카나에 대한 소유권을 황제로부터 인정받는 대신, 아직 권력이 약한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탈리아로 남하하며 하인리히 3세의 편을 들었던 성들을 굴복시키고, 교황 빅토리우스 2세가 사망하자 수완을 발휘하여 자신의 동생을 교황 스테파누스 9세로 임명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추후 자신이 이탈리아의 국왕이 되었을 때 교회의 승인을 쉽게 받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하지만, 1069년 고트프리트 3세가 사망하게 되는데, 운명의 장난처럼 자연스레 권력은 베아트리체에게 넘어옵니다. 이제 서서히 복수의 서막이 올라갑니다. 토스카나 가문이 추구했던 교회 개혁을 위해 청렴한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수도사, 힐데브란트를 교황으로 지지하고 나섭니다. 그리고, 베아트리체의 지원 속에 힐데브란트는 교황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가 바로 그레고리우스 7세입니다.

-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A%B5%90%ED%99%A9_%EA%B7%B8%EB%A0%88%EA%B3%A0%EB%A6%AC%EC%98%A4_7%EC%84%B8 -

베아트리체와 마틸다는 교회의 힘을 강화하고, 황제에게 복수하기 위해 교황과 함께 교회 개혁에 돌입합니다.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하고, 마틸다의 계획을 받아들여 성지 탈환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할 십자군에 대한 준비 작업도 이루어집니다. 그중에 황제와 관련된 개혁안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황제의 성직자 임명권을 철폐하고 모든 교회는 교황을 수장으로 하여 통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전쟁도 불사할 정도로 열받기 시작합니다. 대주교는 당시로 따지면 영지가 딸린 백작의 지위에 해당되기 때문에 황제든, 교황이든 자기편 사람을 임명할 수 있는 권리는 중요한 이권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던 기억이 있는 하인리히 4세는 황제의 권력을 강화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신정 정치를 꿈꾸던 그레고리우스 7세 카노사 가문의 지원을 등에 업고 돈으로 성직자를 산 황제의 고문 주교들을 모두 파문하며, 교황은 황제까지 폐위시킬 수 있다고 발표를 합니다. 그러자, 황제는 독일 지역의 주교들을 모아서 역시 교황은 악한 자이며, 토스카나의 마틸다와 부정한 관계에 있으므로 교황을 폐위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합니다. 그러자, 폐위 통지서를 받은 그레고리우스 7세는 그 즉시 선언문을 발표하여 황제를 파문합니다. 파문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제명인데, 세례받은 신자가 파문되면 신자로서의 모든 권리가 중지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서로 파문과 폐위라는 초강수를 던진 것입니다.

 

이때, 교황의 선언문을 접한 영주들은 교황의 편으로 돌아서게 되는데, 황제의 권력이 커지는 것은 곧 영주들의 기득권이 침해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황제를 견제한다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황제 밑의 주교들 역시 황제의 파문에 겁을 먹고 일제히 교황 편으로 돌아섭니다. 그리고, 1077년 2월 2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종교회의를 열기로 합의하고 하인리히 4세에게는 그때까지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해제하지 못하면 후임 황제를 선출할 것이라고 통보합니다.

 

분노한 하인리히 4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남하하고 싶지만, 이미 많은 영주들과 주교들이 교황의 편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고민하게 됩니다. 게다가 황제군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격하기 위한 길목에 마틸다가 토스카나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쉽지도 않습니다. 마틸다와 교황의 계략에 완전히 빠진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직접 교황을 만나기 위해 교황이 있는 로마로 향하는데, 교황은 이미 아우크스부르크로 떠나는 중이었습니다. 황제는 교황이 도중에 카노사 성에서 머무른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카노사로 향합니다. 사실 교황과 마틸다는 황제의 대군이 밀려올까 걱정을 하고 있었고, 마틸다의 영지인 카노사성에 피신해 있던 것이었는데 예상 밖의 전개가 펼쳐진 것입니다.

- 카노사 성,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Canossa_Castle -

카노사의 굴욕, 복수에 성공한 마틸다

이 사이 1076년, 베아트리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토스카나 출신인 교황은 자신을 비롯한 청렴한 개혁파 수도사들을 지원해준 카노사 가문과 베아트리체를 잊지 않았기에 토스카나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인 카노사성을 마틸다에게 넘겨주었고, 토스카나의 영주로서 마틸다가 있는 카노사로 황제가 찾아오면서 마틸다는 어린 시절의 치욕을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합니다.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 성 앞에서 교황을 알현하고 사면을 구하고자 맨발에 누추한 차림으로 꼬박 3일을 금식하면서 용서를 빕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비굴하게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라니, 상상만 해도 놀랍습니다. 게다가 황제의 곁에는 황후 베르타와 어린 아들, 콘라트가 함께 서 있었습니다. 22년전 베아트리체와 마틸다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그때 베아트리체와 마틸다를 내려다보던 하인리히 3세처럼 마틸다도 하인리히 4세와 황후, 그리고 어린 아들 콘라트를 내려다봅니다.

- 카노사 성 앞에서 맨 발에 누추한 차림으로 기다리는 하인리히 4세,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B%85%B8%EC%82%AC%EC%9D%98_%EA%B5%B4%EC%9A%95 -

그리고, 마침내,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문을 열게 하고, 하인리히 4세를 만납니다. 황제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고, 교황은 그를 미사에 참석시키고 파문을 거두어 들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요, 마틸다는 하인리히 4세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하인리히 3세가 베아트리체와 마틸다를 살려두어 후환을 남겼듯이, 그레고리우스 7세는 마틸다의 말을 듣지 않고 하인리히 4세를 이렇게 용서합니다. 황제가 예전의 마틸다처럼 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말이지요. 그리고, 복수의 마음을 품은 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마틸다는 이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예감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하인리히 4세와 황후 베르타, 그리고 장남 콘라트,출처: https://www.alamy.it/foto-immagine-enrico-iv-di-germania-n-1050-1106-re-di-germania-e-imperatore-del-sacro-romano-impero-1056-1106-l-imperatore-enrico-iv-inginocchiato-nella-neve-con-sua-moglie-l-imperatrice-bertha-e-il-loro-giovane-figlio-al-di-fuori-della-rocca-di-canossa-italia-1077-cercando-l-assoluzione-p-95517190.html -

하인리히 4세의 반격

황제가 용서를 받고 파문이 거두어졌다는 소식이 퍼지자 황제에게 반기를 든 영주들은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황제를 견제할 명분이 사라진 데다가, 황제에게 반기를 든 영주가 누구인지 황제에게 알려준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반대파 영주들은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새로운 황제로 선출합니다. 그리고는 내전이 벌어집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마틸다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뒤늦게 후회하였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루돌프를 지지하고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하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의 내전을 진압하고 반대파 영주들을 숙청하여 황제권을 강화합니다. 

 

황제는 클레멘트 3세를 대립 교황으로 세우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파문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1080년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도착하고, 그레고리우스 7세가 도망가고 없는 베드로 성당에서 신성로마황제로서 정식 대관식을 치릅니다. 이때 성 안젤로 요새로 피신해 있던 교황은 남부 나폴리의 노르만족에 도움을 요청하고 그들의 도움으로 4년간의 농성 끝에 빠져나오지만, 노르만족의 약탈에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로마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남부 살레르노에서 다시 황제를 파문하지만, 이 역시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85년 성 베드로의 도시 로마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채 살레르노에서 생을 마감하고, 하인리히 4세의 교황에 대한 승리로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가 죽는 그 순간에 카노사에서 하인리히 4세를 죽여야 한다던 마틸다의 말이 귓가에 맴돌지 않았을까요.

 

복수의 완성

하지만 아직 하인리히 4세의 완벽한 승리는 아닙니다. 카노사의 마틸다가 있으니까요. 황제의 군대가 카노사를 연일 침공합니다. 하지만, 영주이자 여전사인 마틸다는 직접 말을 타고 검을 뽑아들어 병사들과 함께 전쟁터에 나갑니다. 그리고 용감히 전투를 지휘하여 성을 지키죠.

 

마틸다는 황제군의 끊임없는 침공으로부터 카노사를 지켜내는 한편, 청렴하고 개혁적인 주교이자 그레고리우스 7세의 편에 있던 우르바누스 2세를 지지하여 교황으로 옹립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마틸다와 친분이 있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와 함께 하인리히 4세의 두 아들을 배후에서 교묘하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충동질을 합니다.

※ 참고로, 후에 우르바누스 2세는 마틸다가 원하던 십자군 전쟁을 일으킵니다.

 

우선 하인리히 4세의 장남인 콘라트에게 이탈리아의 왕으로 추대한다는 명분으로 꾀어내어 황제인 아버지를 배신하고 1093년 반란을 일으키게 합니다. 당시 장남 콘라트는 어린 시절 귀족들에게 동맹의 의미로 볼모로 잡혀 있는 등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었던 데다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탈리아에 머물게 되면서 생모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여 하인리히 4세와 불화가 깊었던 것을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황제의 두 번째 부인인 유프락시아(Eupraxia, 러시아 키예프의 공녀) 역시 남편인 황제를 배신하고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고소합니다. 하지만, 끝내 성공하지는 못하는데 하인리히 4세는 이렇게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반란을 진압하고, 차남을 하인리히 5세로 지목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하인리히 5세마저 결국 마틸다에게 넘어가 교황 편에 서서 황제를 감금시키고 폐위시킨 다음 정권을 잡습니다.

- 당시 마틸다의 영지, 그리고 카노사의 위치, 출처: https://mincioedintorni.com/mantovani-celebri/matilde-di-canossa-una-delle-donne-piu-influenti-del-suo-tempo/ -

이후,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을 지지하던 백성들의 도움으로 하인리히 5세의 군대를 무찌르며 다시 재기에 성공하는 듯 했지만 1106년, 두 아들에게 배신당한 큰 상처를 안고 병사하며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인리히 4세의 죽음으로 마틸다의 복수가 완성되며, 그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이후 마틸다는 1115년 카노사 성에서 숨을 거두게 되는데, 마틸다는 두 번의 결혼을 하였으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영지는 교황의 직할령이 되었고, 피렌체, 피사, 볼로냐 등 그녀의 도시들에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부흥합니다. 그리고, 마틸다 사후 카노사 성이 파괴되면서 1635년,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으로 그녀의 무덤이 옮겨졌습니다.

-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마틸다의 전신상,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D%8B%B8%EB%8D%B0_%EB%94%94_%EC%B9%B4%EB%85%B8%EC%82%AC_%EB%94%94_%ED%86%A0%EC%8A%A4%EC%B9%B4%EB%82%98_%EC%97%AC%EB%B3%80%EA%B2%BD%EB%B0%B1 -

교회 개혁을 위해 헌신한 그레고리우스 7세, 교회의 권력과 맞섰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함께 역사 속에서 기억해야 할 또 한 명의 인물, 마틸다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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